여행 이야기(해외)

터키, 그리스 성지 순례(2006년도)

김혜란골롬바 2012. 5. 30. 13:31

 

4월 17일 (월)

지난 번 성지 순례 이 후 또 나에게 성지 순례의 기회가 올 수 있을까 생각해 왔었는데, 우연찮은 일로 이렇게 다시 장도에 오르게 되었으니 .......

나를 중방 성당까지 데려다 주기 위해 잠을 설친 남편과 잘 다녀오마고 인사를 나누고, 오전 6시 조금 못되어 김 상열(토마스 아퀴나스, 나의 5촌 조카) 신부님과 가톨릭 신문 투어 정 현애(엘리사벳)씨를 포함한 28명이 전세 버스로 인천 공항을 향하여 출발했다.

제법 쌀쌀하고 잔뜩 흐린 날씨로 너무 추워서 두꺼운 옷을 챙기지 않은 게 걱정이었다.

칠곡 휴게소에서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고 여주 휴게소를 거쳐 오전 10시 30분쯤 인천 국제 공항에 도착했다.

 

인천 공항에서

 

트렁크 부치기 전 남편과 휴대폰으로 다시 작별 인사를 하고 휴대폰 전원을 껐다.

면세점을 둘러보다가 오후 1시 20분 이스탄불 행 터어키 항공 TK091 비행기를 탔다.

전번처럼 역시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꼭 12시간만에 이스탄불 아타치르크 공항에 도착했다.

현지 가이드 신 범철(벨라도)씨를 만나 전용 버스로 식당으로 오면서 인사를 나누고, 터어키에 대한 기본 상식을 들었다.

터어키는 한반도의 약 3.5배, 남한의 약 8배 크기로서 인구는 약 7,200만 명 정도인데 약 2,000만 명이 이스탄불에 살고 있다. 주민의 90%는 13세기 중앙 아시아에서 건너 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건설했던 터어키 인들이며 종교는 국민의 99%가 수니파 이슬람교도로 사실상 이슬람 국가이다.

G.N.P는 7천불 정도로서 우리나라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 수준이란다.

EU(유럽 연합) 후보국이며 시차는 우리나라와 6시간이고 서머타임 적용 국가이다.

“Good morning”에 해당하는 아침 인사는 “규나이든”, “ 안녕 하세요”는 “메르아바”, “감사합니다”는 “사올”이라고 말한단다.

기내식 먹은 지 2시간 밖에 안 되었지만 한정식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블루 모스크와 성 소피아 성당의 야경을 보고 호텔로 오는 길에  시내 드라이브를 했으나 난 피곤에 취해서 잠만 잤다.

 

이스탄불 한국 식당에서

 

블루 모스크의 야경

 

Grand Cevahir Hotel에 도착하여 방에 들어오니 밤 11시, 대구에는 새벽 5시이니(그 시간이면 내가 잠에서 깨는 시간인데) 씻고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4월 18일 (화)

무척 오래 잤는 줄 알았는데 깨어 보니 겨우  2시간 잤나 보다.

하기야 이 곳 시간 오전 2시 반이 대구에서는 오전 8시 반이니 그 시간이 어디 내가 잠 잘 시간인가.

여러 가지 기도도 하고 어제 하루의 일을 적기도 하고 가방도 챙기면서 시간을 보냈으나 오전 8시 아침 식사시간 기다리기가 무척 지루했다.

아침 식사 후 호텔 로비 한 쪽에 모여서 소성무일도를 바쳤다.

안 그래도 우리 범물 성당에서도 부활 후부터는 오전 10시 미사 전에 매일 성무일도를 바친다고 했는데, 그래서 난 박 연금(크리스티나)씨와 함께 화요일에 주송을 맡았는데 한번도 안 하고 이렇게 와 버렸으니.....

이 페이지 저 페이지 옮겨가며 기도 바치자니 정신도 없고 무척 어려웠다.


코라 성당

그리이스어 코라(카리에)는 변두리, 또는 시골이라는 뜻으로 비잔틴 시대에 건설된 70Km나 되는 성벽에서 남쪽 성벽에 접해 있었다.

비잔틴 후기의 모자이크와 벽화가 가장 잘 보존된 성당이라  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단다.

내부는 외랑, 내랑, 본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비신자는 외랑까지만 들어 갈 수 있고 더 이상 들어 갔더라도 미사 중 주님의 기도하기 전에 나와야 했다.

성당 천장과 벽면을 모자이크와 벽화 등으로 장식한 목적은 무식한 사람들에게 교리 교육을 시키기 위해서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란다.

 

 

 

 

 


성 소피아 대성당(Aya Sofya, St. Sophia)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성 소피아 대성당은 지은 지 천 년 동안은 세계에서  첫 번째로 큰 성당이었고, 지금은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런던의 성 바오로 대성당, 세비야의 대성당, 밀라노의 두오모 대성당 다음으로 다섯 번째 큰 성당이란다.

이 성당은 바닥에서 천정 돔까지의 높이가 무려 56m(16층 건물의 높이)이며, 돔의 지름이 36m나 되고, 대성당 전체의 넓이는 70여 평방 미터인데, 내부에 들어가 보면 이 건물의 중심이 되는 기둥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 특징이었다.

아르티메스 신전에서 8개의 돌기둥들을 가져 왔는데 기둥 색깔이 다른 것은 대리석 산지에 따라 색깔이 다른 탓이라고  가이드가  설명해 주었다.

처음에 콘스탄티누스(306-337 재위)황제가 만들었으나 404년 화재와, 532년 민란으로 소실된 것을 유스티니아누스(527-565년 재위)황제가 523년 신축하기 시작하여 5년 10개월의 대역사 끝에 드디어 537년 12월 27일 축성식을 거행코자 입장하다가 황제는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솔로몬 대왕이시여, 내가 당신을 이겼소.”라고 외쳤단다.

이스라엘 임금 솔로몬이 기원전 1천년에 지은 예루살렘 성전보다 이 성당이 훨씬 훌륭하다는 것이다.

이 성당에 들어가려면 중앙에 황제, 총 대주교가 출입할 수 있는 큰 문이 있고 그 큰 문 양 쪽으로 사제나 귀족들이 드나들 수 있는 작은 문이 하나씩 있으며, 또 그 문 양 쪽으로 평민들이 드나들 수 있는 더 작은 문이 3개씩 있었다. 우리들은 황제가 된 기분으로 중앙에 있는 큰 문을 지나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이 층에 황후가 예배드린 곳이라고 표시 된 자리에 서서 사진도 찍었다.

종교적인 갈등 때문에 교황 님들 중 아직 아무도 성 소피아 대성당에 와 보신 분이 없다고 했다.

 

황후가 예배 드린 곳에 나도 서 봤다

 

 

 

 

 


점심 식사 후 오후 3시 보스포러스 해협으로 가서 유람선을 탔다.

콘스탄티노풀(지금의 이스탄불)은 보스포러스 해협 저 쪽 유럽과 이 쪽 아시아 양 대륙에 걸쳐 있는 도시로서 양 대륙을 잇는 가교이다.

보스포러스 해협은 흑해와 마르마라해(“마르”는 “대리석”이라는 뜻으로 이곳 특산물인 대리석이 많다는 뜻에서) 사이의 해협으로서 길이 32Km, 평균 넓이 3.3평방Km,(최대 4.7평방Km, 최소 660평방m), 평균 수심 70m라고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 후에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현수교 두 개가 만들어졌고, 양 쪽 지역 사람들이 그 다리를 통해 자동차로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단다.

따라서 우리는 이번 여행에서 유럽과 아시아 땅을 동시에 밟아 볼 수 있게 되었다.

배 위에서 “이 쪽은 유럽, 저 쪽은 아시아” 하면서 한 시간 가량 주위 경관을 즐겼다.

해변 가에 잇대어서 아주 예쁜 집들이 많았는데, 호텔이나 레스트랑으로 영업 중이었고, 그 중 상당수가 유럽 사람들의 별장이기도 하단다.

서서 낚시를 하고 있는 주민들의 모습도 보았다.

 

그랜드 바자르

지붕이 있는 시장이라는 의미 그대로 실내에 있는 상점가이며, 출입구가 20여 개나 되는 터키 민속적 향기가 감도는 토산물 쇼핑 천국이었다.

옛날에 대상들이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 올 때 제일 먼저 들러는 곳이란다.

5000여 개나 되는 작은 상점들이 무수하게 들어 차 있지만 대부분 같은 품목끼리 몰려 있었다.

정찰 제가 아니어서 에누리가 무척 심했다.

도자기 냄비 받침(벽걸이용 타일)을 몇 개 샀는데 처음에 2개에 10달러 달라고 하더니 깎고 또 깎아서 5개에 14달러에 흥정했는데 나보다 나중에 산 사람은 그보다 더 싸게 샀다고 했다.

길 잃어버리지 말라고, 또 소매치기 조심하라고 가이드가 신신 당부 했다.

터어키 국화가 튜울립이라는게 뜻밖이었다. 그래서 길거리에는 여러 가지 색깔의 튜울립이 무척 예쁘게 심겨져 있었다. 지금까지는 튜울립이 네덜란드의 국화라고 알고 있었는데.....

 

 

 

투르크족들이 중앙 아시아에서 나올 때 튜울립을 가지고 나왔고, 이 꽃이 다시 네덜란드로 들어갔다고  했다. 근래에 튜울립 심는 정책으로 도시 곳곳을 튜울립으로 조경하고 있었다.

시차 때문인지 밤잠을 통 못 잔 탓에 버스를 타기만 하면 잠들곤 했다.

 

저녁 식사 후 호텔에 들어오니 저녁 8시, 피곤함을 풀려고 호텔 수영장에 갔더니 물이 너무 깊어 도저히 할 자신은 없고, 목욕탕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 샤워만 하고 올라 왔다.

차라리 호텔 객실 욕조에서 반신욕이나 할 것을.......



4월 19일(수)

새벽에 또 잠이 안 와서 혼났다.

오전 2시 반쯤 깨어서 언니에게 방해 될까봐 변기 위에 큰 타월을 깔고 앉아서 어제의 일들을 적었다.

아침 식사 후 성무일도를 함께 바치고 오전 9시 호텔을 나섰다.


톱카프 궁전

Golden Horn 해협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세워진 현존하는 오스만 제국의 거대한 궁전으로, 15세기부터 19세기 말 까지 Ottoman 제국의 황제(Sultan)들이 살던 곳이다.

궁전의 이름은 ‘문에 대포가 있는 궁전’이라는 뜻으로 Top(대포) Kap(문) Saray(궁전)이라 불려진 곳이다.

그 위치가 군사 요충지로서 동서 교역의 접점인 보스포러스 해협을 향해 포를 포진해 놓았던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본래는 성 소피아 대성당 터였었는데, 1459년에 착공되어 여러 술탄들이 증축했으며, 그 규모는 전성기에 6천여명이 살았을 정도로 컸으나 오스만 제국이 몰락하고 1923년 터어키 공화정이 수립된 이후 박물관과 유물 보관 장소로 바뀌어서 사용되고 있었다.

궁전 안을 들어가자면 3개의 문을 통과하도록 되어 있는데 첫 번째 문 구역에는 왕정에 필요한 사람들과, 술탄을 수발하는 사람들의 주거 장소 및 동물들 사육장, 농기구 등 연장 보관 장소라 했다.

이 구역 내에 가장 오래 되었다는 성 이레네 성당이 있었는데 이 성당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25주년 즉위 기념식을 거행했단다.

여러 건물 중 주방으로 사용되던 건물에는 수많은 굴뚝들이 지붕 위에 있었으며 그 시절 주방에서 사용하던 도자기 2만여점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중국과 일본에서 들여 온 것들이 많이 있었다.

마지막 전시실에는 술탄들이 사용했고, 또 선물 받았던 장식품들이 있었는데 그 화려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 중 스푼 3개와 맞바꾸었다하여 일명 ‘스푼 다이어’ 라고 불리어지는 무려 86캐럿 짜리 다이어와, 2만 5천여톤의 금으로 만들었다는 황금 의자(크기가 거의 침대 수준)와, 그리고 여러 가지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페르시아 칼이 유명하다 했다.

이제 어지간한 보석은 눈에 차지 않을 것 같았다.

튜울립이 이 나라의 꽃이라는 것을 확인하듯 그릇이랑 장식물 문양에 튜울립이 많이 새겨져 있었다.

 

 

 

 


블루 모스크

기도 시간이 되면 들어 갈 수 없다 하여 서둘러 갔다.

이슬람 사원인 블루 모스크는 술탄 아흐멧 1세(1609-1616 재위)가 성 소피아 성당을 능가하는, 더 크고 웅장한 모스크를 짓기 위해 성 소피아 대성당 바로 맞은편에  많은 심혈을 기울여  이 모스크를 건축하였으나  규모는 성 소피아 대성당 보다 더 적고, 대성당보다 1000년 뒤에 건축되었으며, 대성당은 6년 만에 완공되었으나 블루 모스크는 7년 만에 완공되었다고 했다.

천장 돔까지의 높이는 43m(대성당은 56m), 돔의 지름은 23m(대성당은 36m) 로서 소피아 대성당을 능가하기는 부족했었다.

블루 모스크라고 불리는 이유는 내부에 2만여 개나 되는 푸른 타일로 아름답게 장식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160여 개의 스테인드 글래스 꾸며져 있었다.

오스만 제국 술탄들은 종교적인 중요한 선언들을 이곳에서 가졌고, 종교 휴일에는 이 곳에서 축제와 메카를 향한 순례의 출발지가 되었단다.

둥근 천장의 4개의 돔과 6개의 높은 첨탑, 가지각색의 빛깔과 무늬가 정성껏 짜여진 바닥의 양탄자가 있는 대형 모스크로, 오스만 제국의 영화를 자랑하고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아흐멧 1세가 메카로 떠나기 전에 건축가에게 황금으로 된 모스크(첨탑)들을 세울 것을 명령했으나 당시 재정 형편상 불가능함을 깨달은 건축가가 재치를 발휘하여 터어키 말로 금(Gold)은 ‘Altin'이고, 여섯(six)은 ’Alti'이므로 명령을 따른다는 뜻으로 6개의 돌 첨탑을 세운 것이라 했다.

그래도 꼭대기 끝부분에는 노랗게 금칠이 발라져 있었다.

이슬람교도들의 주일은 금요일이고, 음력을 사용하고  있단다.

첨탑을 만든 이유는 장식용이기도 하지만 그 곳에 올라가서 하루에 5번 있는 기도 시간을 알린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 첨탑에는 확성기가 붙어 있었고, 호텔에서 자다보면 새벽에도 들려오고 우리가 순례 중에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블루 모스크 사원

 

오벨리스크  앞에서

전차 경기장

블루 모스크와 잇대어 있었는데 그 당시 4만 명 정도 수용했으며, 14Km나 된단다.

3개의 오벨리스크가 남아 있었는데 거기에는 그 당시의 전차 경기를 관람하는 귀족들의 모습과 경기와 관련된 내용들이 부조되어 있었고, 귀족들의 치적들이 새겨져 있었다.

하나는 로마에서 옮겨왔는데 이 큰 것들을 옮겨오기 위해 천 마리나 되는 양들을 잡아서 내장을 빼낸 후 그 속에 바람을 불어넣어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싣고 왔단다.

 

현지 식으로 늦은 점심을 먹고 순례 지에서의 첫 미사를 드리기 위해 물어 물어서 공항 근처에 있는 성당을 찾아갔다.

이스탄불 Iskele Caddesi 거리에 있는 성 에티에네 성당이었다.

이슬람교도가 97%나 되는 이 곳에서 성당이 존재하는 게 신기했다.

나에게 성지 순례의 기회를 주신 은총에 감사하는 미사를 봉헌했고 미사 중 독서를 내가 했다.

 오늘 복음 말씀은 루카 복음 24:13-35에 나오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 만난 예수님”이었다.

우리들이야말로 정말 거창한 엠마우스 행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신부님께서 강론 말씀에서 “우리가 이번 순례 길에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실 예수님을 잘 맞이합시다” 라고 말씀하셨다.

성당 안에는 여러 지향의 제대들이 있는 등,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미사 후 본당신부님과 인사를 나누고 기념 사진도 찍었다.

 

본당 신부님은 이태리 출신의 90세의 고령이신 알베르또 신부님이셨는데, 1945년도부터 이 곳에 계셨단다.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과 수년간 같이 지내셨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5번이나 이 곳에 오셨다고 자랑하셨다.


오후 5시 20분 발 아다나 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시간에 쫓겨서 급히 공항으로 향했다.

현지 가이드 Okan씨는 경비를 절약한다고 다른 교통편으로 먼저 아다나로 갔단다

운전기사가 길을  모르는지 경찰 차의 에스코트를 받으면서 버스를 달렸다.

수속을 하는 동안 한국에 있는 남편에게 공중 전화로 안부를 전했다.

1시간여(170Km)를 비행 후 아다나에 도착해서 다시 전용 버스를 3시간이나 타고 안티오키아(Antakya)로 향했다.

중간에 식당에 들러서 현지식(양고기 케밥)으로 저녁 식사를 했는데, 주방장이 빵을 큰 미역 줄기처럼 얇고 크고 길게 구워서는, 쳐질까봐 조심스레 들고 와서 식탁 위에 놓는 것이 특이했다.

Grand Antakya Hotel에 투숙하니 밤 12시가 가까웠다.

너무 피곤해 모두 녹초가 되었다.


 

4월 20일(목)

아침 식사 후 성무일도를 바치고 오전 8시 40분 호텔을 나섰다.

어제까지는 관광 차원의 순례였고, 오늘부터는 본격적인 성지 순례란다.


베드로 석굴 성당

뚜렷하게 바오로와 교부 시대의 유적이 남아 있는 것은 없지만, 베드로, 바오로 시대에

안티오키아 그리스도인들이 몰래 모여 미사를 드린 곳이라는 전설이 깃들여 있을 뿐이란다.

이 석굴 성당 정면은 프랑크족 십자군들이 안티오키아 공국을 건설했을 때(1098-1268) 다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단다.

이 성당은 높이 13m, 넓이 9.3m, 길이 7m로 변색된 동굴 내부는 어둡고, 바닥은 모자이크 십자형으로 되어 있고, 제대 위의 벽에는 베드로 사도가 천국 열쇠와 두루마리 성서를 들고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다.

또한 박해자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하여 안 쪽 구석에는 허리를 굽히고 들어 갈 수 있는 비밀 통로와 입구가 있었다.

통로 길이가 약 4Km이며, 중간에 여러 통로로 갈라져 있어 초대 교회 신자들의 도피처로 이용됐던 것으로 짐작된단다.

1960년대 교황 바오로 6세가 이곳에서 미사를 집전하시고 이 곳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에게 전대사를 허락하셨단다.

 

                베드로 석굴 성당 안에서


-바오로의 제1차 전도 여행- (사도행전 13;4 )

   성령께서 파견하신 바르나바와 사울은 셀레우키아로 내려간 다음, 거기에서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간너 갔다.

 

안티오키아는 교통의 요충지였기에, 바오로는 세 차례에 걸쳐 지중해 동부 지역에 광범위한 전도 여행을 하였는데 루카의 고향인 안티오키아를 전도의 거점으로 삼고, 배편을 이용할 때면 안티오키아에서 32Km 떨어진 셀레우키아아 항구를 이용했다고 했다.

사도 바오로도 제1차 전도 여행때(45-49년) 이 외항에서 떠나고 여기로 귀항했단다.

지금은 체블리크(Cevlik)라는 볼품 없는 포구였다.

 

               셀류기아 항구에서

 

사도 바오로의 고향 타르수스에 도착하여 점심 식사를 했다.

바오로는 세차례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되자 로마의 파견 대장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사도행전 21;39

바오로가 대답하였다. “나는 유다 사람으로, 킬리키아의 저 유명한 도시 타르수스의 시민이오."

바오로는 타르수스에서 태어난 지 여드레만에 할례를 받았고(필립3;5), 개심 후 3년이 지난 36년경에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나 본 다음(갈라 1;17-19), 고향 타르수스로 돌아가 약 8년 동안 지냈다.(사도 9;30)

제2차 전도 여행 때(50-52년)도 바오로는 고향 타르수스를 거쳐 갔을 것이 틀림없단다.

지금 시민의 수는 10여만명 정도이고, 불행히도 이 곳에서 바오로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었다.

바오로 옛 집터라고 하는 곳에 바오로 생가 우물이라는 것도 있었으나, 타르수스 시청에서 순례자들을 끌어들이려고 어느 부잣집 우물에다 그런 딱지를  붙였을 뿐이란다.

도심에 바오로의 성문이라는 게 있었는데, 이는 바오로 시대 이후에 세운 로마식 성문으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염문을 퍼뜨리며 지나다닌 곳이라 하여 일명 클레오파트라 성문이라 한단다.

그 성문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은 후 가파도키아로 향했다

 

        바오로 사도 생가 우물

 

           클레오파트라 성문

 

3시간 이상 버스를 타고 오다가 중간에 버스가 고장이 나서 고치는 동안 1시간 이상이나 길에서 기다렸다. 운전 기사의 아들이 타고 있었는데 생각건대 취직도 안 되고, 그래서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도우면서 일을 배우는 모양이었다. 고장이 나니 다른 차를 얻어

타고서는 부속품을 사서 다시 다른 차를 얻어 타고 오는 모습이 무척 착해 보였다.

버스 고치느라 길에서 지체한 시간으로 중간에 휴게소에서 저녁을 먹었다.

이제 이 곳 현지식에는 질릴 지경이었다

제일 먼저 멀건 콩죽 같은 콩 수프와 딱딱한 빵이 나오고 올리브유와 식초로 버무린 야채(주로 양배추 채 썰은 것)가 나온 후, 주요리인 고기와 밥이 나오고, 후식(주로 오렌지)이 나왔는데 이 곳 밥은 쌀을 끓는 물에 넣었다가 건져서 볶은 것이라 힘(경상도 사투리로 ‘히마리’)이 하나도 없었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에 Peri Tower Hotel에 투숙했다.

내일부터는 정말 제대로 된 성지 순례라는 가이드의 말에 기대를 걸며 씻고 잠을 청했다.



4월 21일(금)

오전 8시 40분 호텔을 나섰다.

해발 1000m 지역이라 춥다고 하더니 별로였다.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땅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카파도키아는 터어키의 수도 앙카라에서 남동쪽으로 280Km 떨어진 네브쉐히르 도시 일대의 광활한 고원 지대였다.

이 지역은 원래 사암 지대였으나, 신생대 3기 화산으로 인하여 화산재가 응회암이라는 암석으로 굳어졌고, 오랫동안 지각 변동과 풍화 작용으로 생겨 난 원추형의 현상은 약 800Km를 이루고 있었다.

마치 울진 성류굴의 몇 배나 되는 동굴들을 길에 전시해 놓은 것 같아, 버스를 타고 가면서 모두들 탄성이 끊이지 않았다.

가파도키아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1세기부터 13세기까지 계속 되었단다.

로마 박해와 7세기 아랍의 침입, 8세기 전후 동로마 내부 갈등으로 성화의 지지자들이 우상 숭배자로 몰려, 박해를 받자 이 곳으로 도피해 지하 동굴 교회를 만들고 성화를 그렸단다. 성화가 처음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1-2세기의 것은 다 훼손되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은 7-9세기의 것들이라고 했다.

동굴 교회는 바위 속 터널을 통해 다른 교회들과 거주지로 연결되어 있고, 또한 지하층으로 내려가는 요소마다 둥근 돌로 만든 문을 두어 외부의 침입이 있을 때 통로를 막았으며, 이웃 간의 통신 수단으로 비둘기를 이용하였고 비둘기 똥은 유일한 거름이 되었단다.

그래서 동굴마다 비둘기가 드나들 수 있는 구멍들이 빠짐없이 있었다.

가파도키아 지역이 성서에 두 번 나왔다.


베드로 사도가 성령을 받고 오순절 설교를 할 때,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파르티아 사람,메디아 사람, 엘람 사람, 또 메소포타미아와 유다와 카파도키아와 폰토스와 아시아 주민.... (사도 2;8-9)”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베드로가 폰토스와 갈리티아의 카파도키아와 아시아의 비티니아에 흩어져 나그네 살이를 하는 선택된 이들에게 인사합니다.(베드로 1서 1;1)

 

데린 쿠유(Derin Kuyu)

깊은 우물이란 뜻을 가졌으며, 지하 120m까지 내려가는 대형 지하 도시로서 현재 8층까지 내려갈 수 있단다.

꼬불꼬불한 동굴 길을 허리를 굽히고 내려가자면 힘이 많이 든다 하여 박 복윤(막달레나) 할머니는 포기 하셨다.

난 내려서자마자 큰(?) 키 덕분에 얼마나 머리를 세게 박았던지 아파서 혼났다. 피난민이 늘어날수록 더 큰 공간이 필요하게 되자 옆으로 혹은 지하로 계속 파 들어가 복잡한 미로를 형성하게 되었단다.

여기서 길을 잃어버리면 100년 후에나 화석이 되어 발견될지 모른다고 절대 딴 길로 가지 말라는 가이드의 주의가 있었다.

지하 도시에는 밖에서 추수한 곡식들과 사료들을 저장하는 곳도 있었고, 포도주를 만드는 곳과 장기간 저장하는 곳도 있었으며, 땅 속 깊이 우물을 파서 지하수를 식수로 사용했으며, 한 곳은 땅 위와 직통으로 통하는 구멍을 만들어 환기가 되도록 했고, 그곳을 들여다보니 환한 바깥 하늘이 보이는 게 무척 신기했다. 동굴 중간 중간에 외부의 침입을 차단하기 위해 둥근 맷돌 모양의 큰 돌이 놓여 있기도 했다. 

2만 여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이 지하 도시는 주거지로 사용하던 방들과 부엌, 교회, 곡물 저장소, 동물 사육장, 포도주 저장실, 성찬 및 세례식을 갖던 장소, 신학교, 지하 매장지, 심지어 감옥까지 있어 도시 기능을 완전히 갖추고 있었다.

이 곳의 지하 도시는 위기시 타 지하 도시로 피신할 수 있는 9Km 정도의 지하 터널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런 지하 도시가 이 지역에 36개정도 있다고  한다

   

데린 구유 안에서

 

 

  오전 11시 윌 구베에 있는 수도원과 병원이 있던 터에서 야외 미사를 드렸다.

바람이 너무 불어서 성작이 쓰러질까봐 한 자매 님이 미사 내내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모두 손에 손잡고 주의기도를 노래로 바칠 때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괴레메

괴레메 계곡은 천연의 자연 조각품으로 환상적이었다.

이 곳은 지상 바위 속에 프레스코와 성화들이 교회마다 장식되어 있으나 대부분 훼손되었지만, 토카르트 교회 같은 곳은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어두운 교회 천장과 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공생활과 기적들, 최후의 만찬, 유다의 배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등이 그려져 있었다.

 

수도원 집성촌으로 바실리우스 성당 등 30여 개의 성당들이 있단다.

점심 식사는 현지 식으로 양고기 요리를 먹었는데, 동굴 속에 만든 식당으로 무척 시원했고, 식당 분위기도 좋았고 맛도 그런 대로 괜찮았다. 어떤 형제분께서 생수 병에 담아 오신 소주를 한 잔 곁들이니 금상첨화였다.

식사를 하고 나오니 식당 앞 노점상의 한 아줌마가 내 목에 그물 스카프를 둘러 주기에 거울을 보니 어울리고 값도 싸기에 샀더니,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모델! 모델!” 하면서 나를 가르쳤다. 그래서 몇 개 팔기에 “모델 했는데 뭐 없어요?” 했더니 그 말을 알아듣고 ‘악마의 눈’으로 된 열쇠 고리를 하나 주는 것이 아닌가! 이 곳 사람들은 이 ‘악마의 눈’을 마스코트(일종의 부적)로 여겨서 현관문이나 차 안에 붙이고, 그리고 귀걸이나 팔찌 등 온갖 액세서리에 이용하고 있었다. 우리가 타고 다니는 버스 안에도 몇 개나 붙어 있고, 가는 식당마다 붙어 놓은 곳이 많았다.

  미국의 그랜드 캐년을 닮은 험준한 골짜기인 파샤바 계곡을 지나, 운석이 떨어져 호수가 만들어졌는데 물 색깔이 아침저녁 달라진다는 오부룩도 찾아 가 보고, 꼬냐로 이동했다.

 

물 색갈이 아침 저녁 달라진다는 "오부록 "호수

 

3천m나 된다는 핫산산 산봉우리에는 눈이 하얗게 쌓여 있었고, 들에는 양 떼들이 무리져 있었다.

양떼들의 속성이 여름에는 다닥다닥 붙어서 자고, 그래서 안 그래도 열이 많은 동물이라 더워서 떠 죽을 판이고, 겨울에는 덤성덤성 떨어져 자서 얼어죽을 지경인데, 이들 속에 염소를 풀어 넣으면 염소들이 양 사이에 비집고 들어 가 자므로서 양들이 떠 죽지도 얼어죽지도 않는다고 가이드가 얘기해 줬다.

오늘의 말씀 사탕은 “주님께서 언제나 갚아 주시되 일곱 배로 갚아 주신다.(집회 35;10)” 이었다.

꼬냐에 있는 Rixos Hotel에  투숙했다.

 

4월 22일(토)

오늘은 오전 6시 모닝콜, 7시에 호텔을 나섰다.

아침 식사 후 버스를 타기 전 어젯밤 영은이가 대구에 온다 했기에 대구에 왔나 하고 전화를 했더니 엄마가 폐렴 증세로 중환자실로 옮기셨다는게 아닌가!

그래서 그 소식을 들은 언니가 창원에서 오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별로 심한 편은 아니지만 워낙 연세가 높으셔서 알 수 없다고 의사가 말하더라는 남편의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제발 내가 성지순례를 마치고  대구에 돌아 갈 때까지 제발 아무 일 없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더군다나 내가 이 곳에 온 것을 오빠, 언니는 모르고 있는데....

마음이 영 심란했다.

사촌 올케 언니한테 얘기했더니, 걱정말고 주님의 뜻에 맡기고 기도하자며 나를 위로했다.

이 곳에는 겨울에만 비가 오지 이 계절에는 절대 비가 오지 않는다는 가이드의 장담과는 달리 어제 밤부터 비까지 내렸다 말았다를 반복했다.

성서에 이고니온(사도 13;51, 14;1, 19;21, 16;2,, 디모 후 3;11)이라고 나오는 이 곳 꼬냐에는 바오로 사도에 대한 남아 있는 별 뚜렷한 유적은 없었다.

사도 바오로가 제 1차 전도 여행 때 지금의 알바츠인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이어 여기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전도했다고  한다.(사도 14;1-7)

제 2,3차 전도 여행 때 사도 바오로가 다시 방문 했으리라고 추정(사도15;41-16;1,18;23) 한단다.

안티오키아 이름의 도시가 60여개정도가 있는데,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는 아우구스토 황제 때 수도로 삼았던 적이 있어 로마 시대의 유적들이 남아 있다고  했다.

쓰러지다만 돌무더기만 있는 곳에서 사도행전 13-14절의 말씀을 들으며 묵상하고 주의 기도를 바쳤다.

먼저 찾아 온 순례 객들이 미사 드리기 좋도록 돌로 제대를 마련해 놓았지만 비 때문에 미사를 드릴 수 없어 아쉬웠다.

 

먼 거리를 몇 시간을 버스로 달리고 또 걸어서 와 보면 돌무더기만 있고, 이슬람교가 주된 종교인지라 종교 의식은 못 하도록 되어 있었다.

옛 문화의 화려함을 대변하는 거대한 건물들의 잔해가 여기저기 널려 있고, 누워있는 기둥이며 돌 조각들이 그대로 관광 자원이었다.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 7개 교회(에페소, 스미르나, 베르가모, 티아디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이아. 묵시록 2;1-3;22) 중의 하나인 라오디케이아 교회가 있던 곳이라고 추정되는 곳에 다다랐다.

역시 돌덩이들만 산재해 있었다.

 

라우디케이아 교회 터

다른 들꽃과 어울려서 드문드문 피어 있는 양귀비꽃이 너무나 예뻤다.

뱀은 없지만 전갈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가이드의 주의가 있었다.

왼쪽 근처에 있는 콜로새 교회와 이 곳 라오디케이아 교회와, 다음 코스인 히에라폴리스(파묵칼레;Pamukkale)교회가 삼각형을 이룬단다.


콜로새 4;13

에바프라는 여러분을 위하여 , 또 라오디케이아와 히에라폴리스에 있는 이들을 위하여 수고를 많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00Km나 되는 길을 4시간 반이나 걸려 파묵칼레에 도착했다.

호텔로 오다가 목감기가 심한 일행이 있어서 가이드의 안내로 병원에 갔다.

우리들은 병원 앞에서 기다리는 사이에 저녁 성무일도를 버스 안에서 바쳤다.

파묵칼레가 목화 성이라는 뜻이고, 그래서 이곳 면제품이 유명하다하여 면제품 가게도

 둘러보았다.

 

파묵갈레 옛 성문

 

 이 곳 터어키 사람들은 축구에 무척 관심이 많단다.

오늘 저녁에 중요한 경기 중계가 있다고 오늘은 빨리 끝냈으면 좋겠다고 하더란다.

오는 동안 버스 기사와 현지 가이드 Okan씨는 축구 얘기만 나누고 있단다.  

아침 일찍부터 서두른 탓에 모처럼 이른 시간에 "Spa Hotel Colossae Thermal"에 투숙했다.

저녁 식사 후 온천 하러 갔다.

이 곳 온천물은 유황, 칼슘이 많이 포함된 석회수 온천으로서 섭씨 35도로 특히 심장병,

소화기 장애, 신경통 등에 특수한 효과가 있단다.

이 곳 온천은 남녀 혼탕이라 꼭 수영복을 입어야 되고, 온천 안에서 비누, 샴푸 사용은

못하게 되어 있고, 또 온천 후에는 그대로 말려야 효과가 좋다 길래 객실에서 세수하고 샤워하고 온천물에 들어가니 이건 수영장 분위기였다.

 물은 별로 뜨겁지 않았고, 이 곳 물이 건성 피부염에 좋다하니 툭하면 잘 가려운 나로서는 기대해 볼까?

어제 오늘은 밤 10시도 되기 전에 잠들 수 있었다.



4월 23일(일)

아침에 나오니 다행히 비는 그쳤는데 안개인지 비구름인지 뿌옇게 흐려 있어서 먼 데까지 보이지 않았다.

어제 빙산처럼 허옇게 뒤덮인 바위 위에 올라갔으나 짙은 안개로 잘 볼 수 없었다.

산화 칼슘 성분의 온천수가 시가지 아래 언덕으로 흘러내리면서 공기와 접하여 새하얀

석고처럼 응고되어 그 일대가 마치 목화가 핀 것처럼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입구 성 밖에 공동 묘지가 남아 있는데 1200개 정도의 무덤이 있고, 신분과 계급에 따라

석관, 돌집, 잔디로 봉분을 한단다.

로마 시대의 전형적인 문으로서 세 개의 아치로 도시로 들어가는 문이란다.

사도 필립보가 여기서 전도하다가 도미시아누스 황제(81-96년 재위) 박해 때 여기서

순교했단다.


아랍어로 “인샬라”(신의 뜻이라면)..... 10시 반에 예약되어 있는 미사에 늦지 않도록 날씨가 이런가 보다고 이것도 신의 뜻이라고 가이드가 말했다.

2시간 이상을 달려서 에페소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성무 일도도 바치고, 서간경 골로사이서도 봉독하며 묵상했고,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이 집약 된 성가 399번 “주님 안에 우리 하나 되었네”를 함께 불렀다.

어제 밤 축구 보느라 잠을 못 잤는지 Okan씨는 버스 타자 마자 계속 잠만 자기에 “Don't you sleep last night?" 라고 쪽지에 써서 건넸더니 돌아보며 밝게 웃어 주었다.


성모 마리아의 집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예루살렘에서 이사 와서  성모 님께서 사도 요한과 함께 사시다가 돌아 가셨고 몽소 승천하신 곳이란다.

1961년 요한 23세 교황이 그 집에서 정기적으로 전례를 거행하는 것을 허락하고,

 1967년 바오로 6세 교황이 참배하고, 1979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참배한 다음부터

세계 각지에서 온 순례 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들은 옆 경당을 빌어서 주일 미사를 드렸다.

이번 주일은 옛날에는 부활 대축일에 세례를 받은 영세자들이 영혼의 결백을 상징하는

흰 옷을 입고 부활 팔일 축제를 지낸 다음 오늘 벗는다는 ‘사백 주일’이고

요즘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뜻에 따라 “하느님의 자비 주일‘이라고 하는데,

복음은 요한 복음 20;19-31절에 나오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와 “토마의 불신앙”

이었다.

성모님께서 돌아 가셨을 때  토마 사도는 사도들 중 가장 멀리 인도까지 전도하러 갔다가 성모님의 임종을 못 봤다고 했다.

장례 후 도착한 토마 사도가 성모님의 죽음을 확인하고자 관을 열었을 때 관은 비어 있었고, 이 사실로 성모님께서 승천하신 것을 알게 되었단다.

“바로 이 자리에서 성모님께서 사셨고, 바로 이 자리에서 성모님께서 승천하셨습니다.”

신부님 강론 말씀의 첫 구절이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쪽지에 적어서 끼워 놓는 곳이 있었고. 기적으로 인증되지는 않았지만 이 곳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고 치유의 은사를 받고 짚고 온 지팡이를 내버리고 간 사람도 많았다고 해서, 우리들도 모두 생수 병에 그 물을 받아 왔다

 

성모 마리아께서 요한 사도와 함께 사시다가 승천한  곳(에페소)에 세워진 성당

 

성모님의 옛 집 마당에 순례자들이 원하는 글을 적어 꽂아 놓았다 

.

미사를 마치고 가죽 제품 가게로 안내되었다.

제품 설명과 패션 쇼를 보여 주었다.

 그런데 우리 일행 중 윤 문기(도미니꼬)씨와 엄 정자(데레사)씨가 즉석 모델로 뽑혀서

같이 패션 쇼를 해서 무척 즐거웠다.

그들이 임의로 지적했는데 공교롭게 부부를 맞춰 뽑다니.....

원래 가죽 원피는 터어키산이 가장 품질이 좋고 유명하여 이태리 여러 명품 메이커로

납품되고 있다고 했다.

내가 본래 가죽옷을 즐기는 터라 이것저것 입어 보다가 양면으로 입을 수 있는 반코트를 골랐다.

몇 차례의 에누리 끝에 600달러에 덥석 샀으나 후회할 짓을 한 게 아닌지....

점심 식사 후 에페소로 향했다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내는 말씀(요한 묵시록 2;1-5)

   "에페소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오른 손에 일곱 별을 쥐고 일곱 황금 등잔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네가 한 일과 너의 노고와 인내를 알고, 또 네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못 한다는 것을 안다.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을시험하여 너는 그들이 거짓말쟁이임을 밝혀 냈다. 너는 인내심이 있어서, 내 이름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지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등잔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 버리겠다.

 

에페소는 ‘인내’라는 뜻으로 초대 교회 사도 바오로가 제2차 전도 여행(사도 18;19-28)

시에 이 곳에 잠시 머물렀고, 제3차 전도 여행 시에는 2년 3개월 간 머물면서 많은 기적을

행하여 많은 사람들이 책을 모아 모든 사람들 앞에서 불사르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단다.(사도 19;1-20) 

 바오로는 이 곳에서 복음을 전하였고, 디모테오, 아길라, 브리스킬라, 아폴로, 두기고

(사도 18;18-26, 디모 2서 4;12) 등이 복음을 가르쳤단다.

바오로는 로마 옥중에서도 이 곳에 편지를 보냈으며, 로마에서 순교한 후에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부탁하신 말씀(요한 19;26-27)에 따라 마리아를 모시고 이 곳에 와서 살면서 요한 복음과 요한 서간경을 저술했었다.

한편 4세기경에 에페소는 소아시아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의 중심지로서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는 200여명의 주교님들이 모여 성모 마리아의 신학적 위치에 관한 중대한 결정을 내려 마리아를 ‘Mother of God'로 확인되었고, 정통 교리인 니케아 신경이 재확인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구분하였던 네스토리아파는 파문을 당하였다 한다.



사도 요한의 무덤

요한은 성모님을 모시고 예루살렘에서 에페소로 옮겨와서 지금의 에페소 시내 성모 성당터(불불산 중턱)에서 살았고, 파트모스 섬에서 유배 생활을 한 후, 에페소로 돌아와 100년경에 죽어서는 에페소 서쪽 언덕 뒷 산에 묻혔다고 하는데 그 곳(아야솔루크 요새 아래)에 4세기경에 목조 성당이 건축되었단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527-565)때 돌과 붉은 벽돌로 증축했으나 8세기 때 이슬람의 침입으로 오늘날은 페허 위에 수많은 유적의 흔적만 남아 있으며, 십자형 성당 한복판 대리석

기둥 네 개가 서 있는 곳이 요한 사도의 무덤이라 했다.

  

사도 요한의 무덤(에페소)

 

요한 복음으로 학부 논문과 석사 논문을 쓰셨던 신부님께서는 이 곳이 꼭 오시고 싶었던 곳이었다고 말씀하셨다.

카톨릭에서는 베드로 사도가 중심이 되고, 동방 정교에서는 요한 사도가, 개신교에서는

바오로 사도가 가장 중심이 된단다.

에페소, 베르가모, 필라데피아 등지에는 비잔틴 시대에 요한 이름을 딴 성당은 많으나

바오로 성당은 전혀 없단다.

이는 소아시아 지방에서 바오로보다 요한의 영향력이 더 컸고, 바오로 사도 보다

요한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의 활동이 더 많았기 때문이란다.  

 

에페소에 있는 사도 요한의 옛 교회 전경


고대 에페소 도시

에페소는 번창한 항구 도시이자 상업 도시로서 귀족들과 그 부인들이 뻔질나게 드나들었었는데, 카이스트로스강을 타고 흙이 씻겨 내려 와 지금은 배가 드나들지 못하고,

 바다와 에페소 사이에는 큰 거리가 생겼는데, 지금은 10Km 밖에 바다가 있다고 했다.

에페소의 인구는 24만에서 30만 명 정도로 로마, 알렉산드리아, 인구가 50만 정도인 안티오키아와 함께 5위 안에 드는 큰 도시였다.

에페소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기원 전 334년 알렉산더 대왕 입성으로 해방되었고,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희라브이 장군 Lysimachos는 에페소에 경기장, 체육관, 원형 극장 등을 세워 에페소를 크게 발전 시켰다.

우리들은 고대 로마 시대의 에페소 도시 육지 쪽에서 들어가서 항구 쪽으로 나갔다.

지금 복원 작업 중이라는데 가장 규모가 크다고 했다.

의회 기관에 해당하는 원로원들의 집회 장소도 있었는데 회의가 없을 때는 소규모의 공연장으로도 사용했단다.

황제를 신격화 하고자 만든 신전 건물은 사제들이 불이 꺼지지 않도록 관리했다고 한다.

신분에 따라 드나든다는 헤라클래스 문을 지나니 황제의 이름으로 바친 분수대도 있었고 바닥에 모자이크 무늬가 아직도 남아 있는 고급 주택가도 있었다.

바리우스라는 사람이 만들었다는 목욕탕(Varius Hamami) 이 있었는데 냉탕, 온탕, 열탕,

 사우나, 수영장까지 다 갖추었다니 망쪼가 든 나라로 목욕 문화가 발달했었단다.

하드리안 신전은 조각들이 대체로 잘 남아 있었는데, 머리가 뱀으로 변한 메투싸의 모습과, 멧돼지 사냥 모습등 에페소와 관련된 사건과 신화들이 조각되어 있었다.

화장실이 있었는데 최초의 수세식으로, 엉덩이를 까고 앉아 볼일을 보면서 회의도 하고

 얘기도 할 수 있도록 동그란 구멍이 주욱 늘어져 있었다.

 우리들도 그때 모습을 그리면서 엉덩이는 안 까고 그 구멍 위에 앉아서 사진을 찍었다.

 

회의 하면서 볼 일 보는 곳(회의실 + 화장실)

 

샐죽 도서관이라고 하는 도서관 건물이 있었는데 한 쪽 벽면만 온전히 남아 있었고,

지혜를 상징하는 'Sophya'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샐죽 도서관 전경 - 옆에 아고라로 통하는 문

   

성문 밖은 시장으로 ‘아고라’라고 불렀는데 홍등가 광고판으로 바닥에 발자국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 당시에 그 발보다 작은 사람은 출입 금지 였다고 한다.

 신부님께서 살짝 발을 대어 보셔서 모두들 웃었다.

 

홍등가 광고 표지판 -이 발보다 작은 사람은 출입 금지라네

 

음향 장치가 잘 되어 있고 2만 4천 여명을 수용했다는 원형 경기장도 있었는데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공연장이었단다. 

 

야외 음악당으로도 사용한 원형 경기장

 

선원들을 위한 목욕탕도 따로 있었다.

  

고대 에페소의 도시 흔적들

 


아르티메스 신전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서 아르티메스 여신은 본래 달의 여신이었으며,

 호머의 작품에는 사냥꾼 여신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 여신은 목축과 짐승의 여신이며, 다산과 풍요의 여신으로서 가슴에 황소 불알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이 신전은 에페소의 상징이었고, 에페소 사람들은 스스로 '전각지기(Temple keeper)'라고 불렀으며(사도 19;35), 아시아에서 많은 순례 객들이 모여들었는데,  에페소의 은장이들은 은으로 만든 여신상을 순례 객들에게 팔아서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는데, 바오로의 활발한 전도로 그들의 수입이 줄어들자 은장이 대표 데미트리오는 은장이들과 시민들을 선동하여 바오로의 일행 가이오와 아리스타르코를 노천 극장으로 끌고 가서 난동을 부렸다.(사도 20;17-38)    

 그 때 에페소 시장이 바오로를 보호하기 위해 직접 나와서 상인들을 진정 시켰다고 한다.

58년경 바오로는 고린토 교회에서 로마서를 집필한 다음 필립비 교회에서 과월절을 보내고(사도 20;6) 돌아오는 길에 알레도스 항구에 들러, 거기서 북쪽으로 50Km 떨어진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을 불러 감동적인 작별 인사를 했다고 한다.

기원전 356년 아르티메스 여신 신전은  한 정신병자의 방화로 불 타 버렸는데, 바로 그때 마케도니아의 수도 Pella에 알렉산더가 출생하여 이 여신이 Pella에 가서 신전을 비웠기에 여신은 방화범에 의해 자기 신전이 불타는 것을 막지 못했단다.

훗날 알렉산더 대왕이 신전 복구를 제안했으나 에페소 시민들은 자력으로 복구하겠다고 대왕의 제안을 거절했고, 그래서 에페소 여자들은 여신 신전 재건을 위하여 갖고 있던

모든 귀금속들을 다 바쳤다고 한다.

재건된 아르티메스 신전은 아테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보다 4배나 큰 규모로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가 되었다.

265년 또 다시 재건된 신전은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종교로 지위를 굳힘으로 인기를 잃게 되어 그리스도인들은 에페소에 성 요한 성당을 짓고, 콘스탄티노풀에 성 소피아 대성당을 지을 때 이 신전을 헐어 건축 자재로 사용함으로써 신전은 깡그리 파괴되고 지금은 비가 오면 늪지대로 변하는 저지대에 12기둥 중 한 개의 돌기둥만이 남아 황새가 둥지를 틀고 있었다.

터어키 속담에 “낙타보다 더 큰 코끼리가 있다” 라는게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과 상통하는 속담으로 알렉산더 대왕이 터어키에  와서 페르시아의 운송 도구인 낙타를 처음 보고 놀랬는데, 인도에 갔더니 코끼리 부대를 보고 더 놀랐다는데서

나온 말이라고 했다.

길에서 구급차를 봤는데, 이곳은 119가 아니고 112였다.

 

순례를 마치고 쿠시다시에 도착하여 Sureli 호텔에 투숙했다.

바닷가를 바로 옆에 두고 있는 휴양 리조트 규모의 아주 큰(별 5개 짜리) 호텔이었다.

오후 7시 뷔페 레스트랑에서 저녁을 먹는데 큰 창문으로 애개해 수평선에 떨어지려고

하는 해를 볼 수 있었다.

 부지런히 저녁을 먹고 카메라를 들고, 해변에 나가서 수평선 너머로 떨어지는 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댔다.

그런데 나중에 사진을 찾고 보니 일출과 달리 일몰은 동그란 해가 잘 나타나지 않았다.

 카메라 성능 탓일까? 기술 부족일까?

 

애개해에서 본 일몰

 

오늘이 터어키에서의 마지막 밤이라고 신부님께서 가져오신 팩소주를 별이 하나 둘 돋아나는 밤하늘 밑에서 찰랑이는 바닷물 소리를 들으며 바닷가에서 마셨다.

신부님과 이 미화(아가다)씨와 포항 덕수 성당에서 온 박 경혜(세실리아)씨와 이 은주(세실리아)씨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고, 난 취하는 줄도 모르고 마셨다.

 두 세실리아씨는 서로 대모 대녀지간이라 했다.

 방에 들어오니 그때사 몸도 가눌 수 없고 몇 차례나 overeat하고, 씻지도 못하고

정신 없이 쓰러져 잤다.

4월 24일(월)

오전 5시 모닝콜, 6시 아침 식사.

파트모스 섬에 가기 위해 일찍 일어나 식당으로 갔으나 이른 시간인 탓도 있지만,

어제 밤 과음(?) 탓에 입맛도 없는데 식사도 어제 저녁에 남은 걸 대충 채려 놓은 것처럼 먹을게 없었다.

시간을 내어 대구에 전화해 보니 영은이는 춘천 갈려고 터미널 가는 길이라 하고 언니는 창원에도 못 가고 엄마 옆에 지켜 있는 상황이고.....

남편은 급하면 연락 할 테니 아무 염려 말라지만 영 마음이 불안했다.

호텔을 출발하여 휴양 도시이자 ‘새들의 섬’이라는 뜻의 쿠시아다스에서 배를 타고 4시간만에 그리이스 파트모스섬(파스란섬)에 도착했다.

한강 유람선 크기 정도의 배였는데 아침을 거의 안 먹은 탓인지 새벽에 언니한테서 귀미테를 얻어 붙였는데도 뱃멀미가 나서 혼났다.

언니를 비롯하여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힘들어했다.

 정신을 다른데 쏟고자 고스톱까지 쳤는데도 소용없어서 누워서 억지로 자 버렸다.

신 벨라도씨는 28일 이스탄불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배 타기 전에 헤어졌고, 배에서

내리니 여자 가이드가 우리를 맞이했다.

애개해, 이오니아해, 지중해에 걸처 12개의 큰 섬들이 있는데 파트모스 섬은 우리나라

거제도 크기 만한 섬으로서 아름다운 곳이며 인구는 약 2500명 정도란다.

이 섬은 로마 제국 시대에 정치, 종교 범을 귀양 보내는 유배지로서 사도 요한은 로마 도미시안 황제 때 이 섬에 귀양와서 약 18개월 동안 이 섬에 있다가 네르바 황제의 즉위로

96년경 유배에서 풀려나 에페소로 돌아갔었다.

귀양 올 때 제자 푸록호르스를 대동하고 40일간 배를 타고 왔다고 했다.

요한 사도는 이 섬의 항구 마을인 스칼라와 이 섬의 중심지인 호라 마을 사이에 있는

‘요한의 동굴’에서 요한 묵시록을 기록하셨단다.

이 곳 사람들은 요한 사도에 의한 관광 수입으로 먹고산다고 할 수 있고, 300개 정도의

그리이스 정교 성당들이 있고, 수자원이 부족하여 옥상에서 물을 모아 저장하여 사용하며, 도둑이 없다고 한다.

동굴은 그리이스 정교회 수도사들이 관리하고 있었는데, 이 곳에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셨단다.

동굴 안에 들어가니 문 양 쪽에 요한 복음과 요한 묵시록 첫 장이 그리이스어로 적혀져

있었다.

고령으로 누워서 기도하시는 요한 사도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고, 머리 두셨던 곳과

일어나실 때 손 짚었던 곳은 움푹 패어져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모습이 노인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요한 사도의 오른손에는 소아시아 시대의 7개 교회를 상징하는 7개의 별을 쥐고 있고,

왼손에는 천당과 지옥의 2개의 열쇠를 쥐고 있었다.

천지 개벽이 일어나 동굴이 3개로 갈라져 금이 나 있었는데 이는 성부 ,성자, 성령을

뜻한다고 전해 오고 있다고 가이드가 설명해 줬다.

동굴 뒤쪽에는 신학교 창설자의 성골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리스 파트모스 섬에 있는 요한 사도 수도원

(일명 요한의 동굴 - 이 곳에서 묵시록을 썼다 함)

 

요한 사도 수도원

호라 마을 증심에 있었는데 정부 보호 지구로서 개축이 불가하다고 했다.

본래는 신전 자리였는데, 11세기 말쯤에 건물이 들어서서 지금은 살아 있는 수도원이란다.

전성기에는 300명 정도의 수사님들이 있었고, 지금은 30명의 수사님들이 있는데,

3명이 유럽인이고 나머지는 그리이스인이라고 했다.

욥기의 가장 완벽한 필사본이 보관되어 있고, 11세기에 모자이크로 만들어진 니콜라오

성인의 성화가 있었다.

 

요한 사도 수도원 성당 앞에서 

 

점심 식사 후 오후 1시 45분  우리들은 자동차가 수도 없이 들어가고 영화 ‘타이타닉’에

 나오는 배처럼 아주 큰 카 훼리  'Blue Star 2'를 탔다.

선착장은 배를 타려는 많은 사람들로 정신 없이 복잡했다.

배 안에는 레스트랑, 스낵 바, 면세점, 헬스장등 많은 편의 시설들이 갖추어져 있었고,

또 뱃멀미를 할까봐 걱정했는데 배 탄 것 같지 않은 것처럼 아무 요동도 없었다.

다른 층도 가보고 싶었으나 길 잃어 버릴까봐, 그리고 많이 움직이면 배멀미 날까봐

근처만 둘러보았다.

배를 탄지 7시간만에 피레우스 항에 도착하니 40대 중반의 현지 가이드 유 복곤씨가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한식으로 저녁을 맛있게 먹고 'Divani Acropolis' 호텔로 가는 길에 그리이스에

대한 기본 상식을 들었다.

그리이스는 민주주의의 발상지이며 의학 용어의 30-50%가 그리이스어로 표기되며, ‘무엇 무엇의 아버지’는 다 그리이스 사람들이란다.(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히포클라테스등)

인구는 약 1100만 명 정도인데 아테네 인구가 350만명 정도이고 종교는 98%가 그리이스 정교이고 나머지는 이슬람교이며, 날씨는 지중해성 기후로 겨울에 온화하고,

 GNP는 약 2만 불이며, 특산물로는 대리석, 올리브유, 연초등이며, 주된 수입원은 선박,

관광 자원, 농수산물 등이라고 했다.

우리나라보다 1.5배의 크기이며 매년 약 1200만 명의 관광객들이 다녀간단다.

지진 때문에 보통 4층까지만 지을 수 있고 시내는 7층까지 건축 허가가 나온다고 했다.

이 나라 사람들은 개를 너무나 좋아하는데 어떤 사람이 화가 나서 길에 있는 개를 발로

찼더니 그 주인이 보고 “당신이 내 개를 발로 찰 때 내 영혼이 흔들린다.” 하더란다.

가로수로 심어져 있는 오렌지 나무에 노란 오렌지가 주렁주렁 달려 있어 무척 보기 좋았는데 이 오렌지는 시어서 먹지 못한단다. 이곳에는 가로수로 오렌지 나무와 뽕나무를 주로 심는다고 했다. 길에는 ‘뜨라미’라 하는 전차가 다니고 있었다.

아침 인사는 “깔리메라”, “안녕하세요“는 ”야사스“, ”사랑해요“는 ”사가뽀“,   ”감사 합니다“는 ”에프가리스토“, ”천천히“는 ”시가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는 ”끼리에 사가뽀“, ”여보세요“는 ”녜“로 전화를 받으면 그리이스 말을 몰라도 ”녜"하면 옆에서 “저 사람은 외국 사람인데 그리이스말도 잘 하네.” 하고 말한단다.

오후 2시부터 5시까지는 세상없어도 회사에서도 학교에서도 낮잠 자는 시간이고,

가게문도 닫고 쉬는 시간이라고 했다.

“성지 순례는 마라톤처럼 완주하는 것만으로도 훌륭하다.”고 가이드가 말했다.

 

4월 25일(화)

여행 중에 계속 새벽 두 세시에 깨어서 잠을 설쳤는데 오늘 새벽엔 꿈에 엄마가 나타나셔서 “나 돈이 없다. 돈 좀 다오.” 하시기에 깜짝 놀라 깨었다.

 불길한 기분이 들었지만 떨쳐 버리고 아침 식사하러 내려오니 오늘 일정표에도 없던 미사가 있다 길래 엄마를 위하여 생미사를 봉헌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크로폴리스

아테네 한복판에 솟아 있는 언덕으로, 도시 국가(폴리스)의 중심이었고 수호신을 제사

지내는 신성한 지역이란다.

 아테네의 상징적인 유적지이자 서양 세계의 가장 중요한 고대 기념물이며 그리이스식의 거대한 궁전으로 기원전 438년에 아테네 여신을 제사 지내기 위하여 세워졌다고 한다.

터어키로부터 그리이스의 독립 이후 아크로폴리스 복원 작업이 신생 그리이스 정부의

첫 번째 과제로 시작되었으며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다.


디오니소스 극장

아크로폴리스 남동쪽 비탈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반원형의 극장으로서 이 곳에서의 공연이 세계 예술가들의 꿈이었단다.

161년 헤롯 아티쿠스의 부인이 죽었을 때 헌납하였다 하여 ‘헤롯 아티쿠스의 오디오’라 부르기도 한단다.

이 곳에서 ‘나나 무스크리’, ‘마리아 칼라스’, ‘앨든 조’, ‘루치아노’, ‘파브리치’등이 공연하였으며 음향에 대한 지혜가 대단하여 마이크 없이 6000여석의 관중들이 다 감상할 수 있다고 했다.

무대 뒤쪽 한 층 높은 곳은 배우들이 연기하던 곳인데, 그 밑에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일생을 묘사한 뛰어난 조각이 남아 있었다.


파르테논 신전

아크로폴리스 중앙에 있는 가장 큰 환주식 신전이며, 그리이스의 수호신 아테네를 제사

 지내기 위해 건축되었다.

유네스코가 정한 인류 문화사적 제1호로 도리아식 건축의 최고봉이며, 15년 간 공사하여 기원전 438년에 완공되었는데, 인류가 이룩한 최고의 걸작품이자 불멸의 예술품으로 가장 완벽한 건축 기술은 다 동원하여 만든 것이라고 했다.

피다고라스 수학적 정의와 황금 분할에 의하여 건축된 높이 12m의 기둥이 46개나 되었다.

  파르테논이란 ‘동정녀’라는 뜻으로 아테네 여신 혼자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가이드 유 복곤 씨가 자주 쓰는 말이 기둥 위에 네모난 상이 보이면 “아! 이것이 바로 도리아식이구먼!” 하라고 해서 우리들은 도리아식 기둥만 보이면 이 말을 복창했다.

착시 현상을 보완하기 위하여 위는 가늘게, 밑은 굵게, 홈을 파는 등의 배 흘림 방식(엔타시스 방식)을 썼으며, 그림자까지 계산해서 간격과 크기를 다르게 했고, 1.5마일 상공에서 꼭지점을 이루도록 기둥들이 7Cm 기울어져 있다고 했다.

돌의 접착력 기술이 그리이스밖에 없으며, 아테네 시민들이 자기 후손들에게 최고 문화

유산을 남겨 주기 위해 만든 거란다.

본래는 눈부시도록 색깔을 입히고 부조가 되어 있었는데 오랜 세월을 지나오는 동안 

다 퇴색되고 마모되어 있었다.

한때는 크리스트교 성당으로, 또 한때는 술탄의 후궁으로, 심지어는 종탑으로 사용되면서 17세기까지만 해도 제 모습을 유지하였으나 1687년 10월 26일 베네치아 군대가 쏘아 올린 포탄이 파르테논 신전에 저장되어 있던 터어키군의 화약을 폭파시킴으로써 지붕이 날아가 버렸으며, 내부 공간과 프리즈, 그리고 아직 복원되지l 않은 남쪽 기둥 6개와 현재는 복원된 북쪽 기둥 8개가 한 순간에 사라져 버렸단다.

복원으로 땜질된 기둥과 벽면들을 가이드는 피부병에 걸렸다고 표현했다.

 


 

제우스 신전

600년 걸려 완공했는데, 104개가 있던 돌기둥 가운데 15개만 남아 있는 고린트 양식의 건축으로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면 제일 먼저 보이는 그리이스 최대의 신전이란다.

황금과 상아로 만든 제우스 상이 있으며 요새로도 쓰였단다.


아리오스 파고스

아크로폴리스 왼쪽 아래쪽에 위치한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는 널찍한 바위로서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몇몇 철학자들에 의해 아레오 파고 법정으로 간 사도 바오로가 아테네 시민들에게 설교한 유명한 장소라고 했다.(사도 17;16-34)

그 아래쪽이 장터인데 여기서는 물건을 사고 팔았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모임도 잦았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등 철학자들이 철학을 논했단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이 결혼을 해야 좋은지 안 해야 좋은지 묻자 소크라테스가 대답하기를 “어떻게 하든지 후회하기 마련이네.” 하더란다.

소크라테스 감옥

악처 ‘크사피테’로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어머니는 산파였단다.

“악법도 법이다.”라고 외치며 이 감옥에 있다가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고 한다.

 

 

2006년 5월 14일자 대구 주보에 나온 플라톤의 말

‘“나는 신에게 감사하고 싶다. 첫째는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난 것이요, 둘째는 자유인으로 태어난 것이요, 셋째는 남자로 태어난 것이다. 끝으로 특히 감사하는 것은 내가 소크라테스를 만난 일이다.”

아크로폴리스 언덕 뒤편에 있는 작지만 아름다운 박물관에는 입구에 부엉이 상이 있었는데, 이 부엉이는 아테네 여신의 상징으로서 잠자지 않고 있다가 아테네 여신에게 밤새 생긴 일들을 보고 했단다.

그리이스 최대의 영웅으로서 33세에 세상을 떠난 알렉산더 대왕상도 있었고, 최초의 환조 조각도 보관되어 있었다.

그리이스 사람들은 만물 생성 원인을 신화에서 찾았다고 했다.

그런데 파르테논 신전 순례 중 현지 가이드가 전화를 받더니 가이드 엘리사벳씨를 바꿔

 주는 게 아닌가!

가슴이 철렁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엄마가 위독 하시단다.

잠시 후 곧 뒤이어 온 전화에 엄마가 운명하셨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어쩌면 이럴 수가! 며칠 만이래도 기다리시지... 그새를 못 참으시다니...

하기야 인력으로 못 하는 일이니...

엘리사벳씨 말이 아테네에서 직항로는 일주일에 두 번 있는데 바로 어제 출발했고,

비행기편을 알아보겠지만 3일장 안에 도착할 가망은 도저히 없고,

파리나 독일, 네덜란드에 가서 바꿔 타고 가는 방법이 있지만 말도 안 통하는데 혼자서 어떻게 가느냐? 였다.

나 역시 자신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오늘 새벽 미국 국방 장관 라이자 여사가 예고도 없이 갑자기 그리이스를 방문하는 바람에 철통같은 경계로 공항은 거의 폐쇄 지경이고, 반미 데모 시위자들로 시내 교통도 마비 상태란다.

그래서 우리 전용 버스도 길이 막혀 우리를 데리러 오지 못한다고 했다.

더군다나 감기 기운이 있으신 주 석환(가브리엘) 할아버지와 박 복윤(막달레나) 할머니는 점심 식사 때 모시러 온다고 호텔에서 쉬시게 했었다.

다행히 파르테논 신전에서 호텔까지 걸어서 5분 거리 밖에 안 된다기에 우리들은 걸어서 호텔로 갔다.

호텔에서 잠시 지체하는 사이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서 상황 설명을 하고, 답답한 마음을 전했다.

우리들은 지하철을 타고 외곽지에서 전용 버스와 만나기로 했다.

그래서 그리이스 지하철까지 타보는 체험을 했다.

지하철 종착역에서 내려 전용 버스를 만나 1시간 반 가까이 달려 고린토에 도착하니

시간은 오후 2시가 훨씬 지나 있었다.

그 곳 식당에서 현지 식으로 점심 식사를 할려니 목이 메여 넘어 가지 않아 억지로 삼켰다.

신부님께 아무래도 내가 한국 가서 장례식이라도 참석해야겠다고 말씀드린 후 엘리사벳씨에게 최대한 빠른 비행기 편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는 것이 엄마에 대한 나의 마지막 도리이고 예의일 것 같았다.


고린트 교회

동서 문명이 만나는 곳이며, 살기가 좋고 장사가 잘 되는 곳이고 따라서 방탕한 도시로서, 처음에 시저가 복구 명령을 내렸으나 실각으로 중지되고, 그 뒤 아우구스투스가 복구 완성으로 그리이스 수도로 삼은 적도 있단다.

그리이스이면서 로마법을 따르므로 ‘타향의 로마’라 한단다.

사도 바오로가 3년의 에페소 생활에 이어 2차 전도 여행 중에 1년 6개월이나 이곳에 머물면서 필립비 교회, 데살로니카 교회, 베레아 교회에 이어 실라와 함께 남부 지역 아카이아에 고린트 교회를 세웠단 다고 한다.(사도 18;1-17)

바오로는 고린트에서도 손수 일을 해서 생계비와 전도 비용을 충당했으나, 자색 염료 장수 리디아를 비롯한 필립비 교우들이 보낸 물질적 지원만은 기꺼이 받아 들였단다.(필립 4;14-16, 고린 후 11;9)

디모테오가 고린트에 내려와서 데살로니카 교우들의 소식을 전하자(데살 전 3;6), 바오로 사도가 데살로니카 교우들에게 전한 편지가 바로 데살로니카 전서이며, 이것이 바오로 서간집 뿐 아니라 신약성서를 통틀어 가장 먼저 씌어진 글이었다.

사도들의 복음 전도 시대에 가장 큰 도시 순으로 로마, 알렉산드리아, 에페소, 고린트, 안티오키아이며 한 때 고린트 인구가 60만 까지 달했다고 한다.

 

고린트에 있는 성 바오로 성당 천정의 스테인드 글라스

 

 

 


고린트 박물관

신석기 시대의 여러 유물들이 보존되어 있었다.

5천년 전의 국자가 보관되어 있었는데, 지금의 모양과 똑같으니 가장 완벽한 주방 도구라 한다.

술이 취해 눈이 붉게 충혈된 술의 신 디오니소스(박카스)의 얼굴 모습도 조각되어 있었고,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우스 신전에서 빌고 난 다음 다 나은 부분들을 조각해 놓았는데, 조각되어 있는 발을 보고 무좀 걸렸던 발인가 보다는 가이드의 말에 모두 웃었다.

“지금은 희미하게 거울을 보는 것 같으나....” 하는 성서 구절대로 그 당시의 청동 거울도 보존되어 있었다.

너무나도 젊고 잘 생긴, 17세에 즉위하여 31세에 실각으로 자살한 네로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네로의 명령이 두려워 잘 생긴 얼굴로 조각했다고 했다.

네로는 그리이스에 미친 사람으로서 세계에서 메달을 제일 많이 받았는데 그 숫자가 무려 1808개에 달했단다.

경기 종목마다 대결을 걸어 상대방에게 일부러 지도록 만들어서 딴 메달들이라 했다. 나중에 실각 후 옳은 방법이 아니었다 하여 그 메달들을 다 몰수당했다고 한다.


아폴로 신전

유물들이 대부분 로마 시대의 것들인데, 이 신전은 예외적으로 기원전 5세기의 도리안 스타일의 그리이스 양식이란다.

아고라 북 쪽 끝에 있는데, 기원전 6세기 경에 태양신 아폴로를 축조하여, 지금은 일곱 개의 기둥만 남아 있었다.

그리이스 신전 중 올림피아의 헤라 신전 다음으로 오래 되었단다.

오후 4시 고린트 교회가 있던 돌무더기 터에서 미사를 시작하려는데 여행사에서 비행기표를 확보했다는 전화가 왔다.

엘리사벳씨와 내가 공중 전화를 찾아 대구에 전화를 걸어 내가 갈 테니 4일장으로 미루어 줄 수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오빠가 그래 주겠다고 하셔서 전화로 예약을 마쳤다.

파리 샤롤 드골 공항에서 26일 밤 9시 20분에 출발하는 비행기인데 다행히 아테네 공항까지 여행사 여직원이 동행해 주기로 했었다.

미사 장소로 돌아오니 다행히 미사는 성찬의 전례 직전이었다.

아침에 준비한 생미사가 사망 미사로 바꾸어져 봉헌되었다.

아까 버스에서 한 낮 성무일도 기도도 오늘이 마르코 사도 축일인데 우리 엄마를 위하여

위령 성무일도를 바쳤고, 또 신부님께서 미사 중에 엄마의 영혼을 위하여 특별히 기도해

주셨다.

영성체때 바람이 불어 날아간 성체가 하필 돌 틈새에 끼어서 미사 후 신부님께서

애를 먹고 겨우 꺼내셨다.

 

사도 성 바오로 기념 성당

입구 한 쪽 벽에는 1대 사도 바오로, 2대 아폴로, 3대 실라를 비롯하여 88대까지의 역대 본당 신부님 명단과 재임 기간이 적혀 있었고, 맞은편 벽에는 고린트 전서 13;1-8 까지의 말씀이 적혀 있었다

성당 안을 둘러보고 성당 안팎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이 곳은 지난 주일(4월 18일)이 부활절이었단다. 이 곳에서는 부활절이 우리의 추석에 해당하는 큰 명절로, 오늘까지 부활절 휴가여서 가게도 닫힌 곳이 많았다.


고린트 운하

고린트 지협과 이오니안해와 애개해를 연결하는 이 운하는 스에즈 운하, 파나마 운하와 함께 세계 3대 운하 중에 하나로서 길이 6Km, 높이 80m, 수심 90m, 폭 24m란다.

67년 경 네로 황제가 3분의 1정도인 6.5Km쯤 뚫다가 갈리아인들의 침입에 의해 중단된 후, 1800년 동안 방치되었다가 19세기 경 프랑스 엔지니어 회사에서 이 운하를 완성시켰단다.

그 당시에는 제법 큰 배가 드나들 정도로 넓게 만든다고 만들었는데, 지금은 원체 큰 배들이 많고, 또 내가 보기에도 무척 좁아 보였다.

이 운하로 피레우스 항이 주요한 지중해 항구로 성장할 수 있었단다.

 

고린트 운하(너무 작아서 실망했음)

 

 

부활절 휴가를 마치고 돌아가는 차들 때문에 교통 정체 현상으로 몇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우려와는 달리 예정 시간에 아테네에 돌아왔다.

고린트로 올 때 버스 안에서 신부님과 엘리사벳씨가 번갈아 가며 읽어오던 고린트 전서를 돌아오는 길에 나도 같이 읽으면서 16장까지 다 읽었다.

버스 안에서 받은 말씀 사탕은 “복되어라. 허수아비 우상에 속지 않고 야훼만 믿는 사람이여.(시편 40;4)” 이었다.

버스를 타고 오면서 내다보니 그리이스 국회 의사당 앞 광장에는 비둘기들이 사람들이 던져 주는 먹이들을 먹으며 노닐고 있는 모습이 무척 평화롭게 보였다. 지나오면서 본 무명 용사 유적비에는 한국 전쟁 참전을 기려 “Korea"가 새겨져 있단다.


하드리아누스의 문

이 문은 고대 아테네와 로마 시대 아테네를 구분하는 경계로서 2세기 초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만든 개선문 형식의 문으로서 아테네 문명을 칭송하고 본받고자 노력한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를 칭송하기 위해 건설되었단다.

아크로폴리스를 향한 면에는 “이것은 테세우스의 고대 도시인 아테네이다.”라고 쓰여 있고, 다른 면에는 신도시를 향하여 “이것은 테세우스의 도시가 아닌 하드리아누스의 도시인 아테네이다.” 라고 씌어 있다고 했다.


올림픽 경기장

아테네의 중심인 산타그마 광장에서 10분 거리에 있었는데, 정문 앞 광장에는 양 옆으로 올리브 나무와 월계수 나무가 보기 좋게 심겨져 있었다.

원래는 일리소스 강을 끼고 아그라 계곡과 아르데토스 계곡 사이에 자연스런 흠이 나 있어 이것을 스타디움으로 이용하였단다.

1870년에 발굴된 현재의 모습으로, 1896년에 부활된 최초의 올림픽 게임이 여기에서 개최되었다고 했다.

 

 

까매오 석과 올리브유 제품(비누, 화장품등)들을 파는 가게에 잠시 들렀다가 어제 저녁에 들렀던 한식당에서 저녁을 맛있게 먹고 호텔에 들어오니 밤 9시 30분이었다.


4월 26일 (수)

어제는 담담했었는데, 새벽 3시에 잠이 깨어 있는데 자꾸 눈물이 나왔다.

우리 자식들은 아무도 울 자격이 없다고 내가 큰 소리 쳤었는데.....

지하 1층에 내려가서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모든 일을 엄마 원하시던 대로 해 달라고 부탁했다.

영주와 내일 서울역에서 만나 같이 오자고 할려니, 벌써 대구 내려오고 있는 중이란다.

아침 식사하러 내려 왔다가 다른 한국 여행객 일행 중에 수녀님 한 분(차 용환 수녀님)이 전번 성지 순례 동반자인 전 인숙(마리아) 수녀님과 같은 한국 순교 복자회 소속이라고 하셔서 반갑게 인사 나누고, 함께 식사하며 얘기 나누었다.

 

 

짐 부치는 절차를 피하고자 내 트렁크는 가이드에게 맡기고, 내 몫까지 잘 보시고
무사히 돌아오시라고 인사드리는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6시간 걸려 메테오라로 떠나는 버스가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가이드 김 옥림(카타리나)씨가 올 때까지 351호 객실에서 기다렸다.

10시쯤 전화가 와서 로비로 내려갔다.

엘리사벳씨는 아테네 공항까지 기차를 타고 갈 꺼라 했는데, 승용차를 갖고 왔기에 카타리나씨의 설명을 들으며 차창 밖의 경치를 보면서 공항으로 향했다.

한국을 떠난 지는 30년이 훨씬 넘었고 그리이스에만 27년을 살았단다.

이렇게 도중에 가게 되어서 매우 유감스럽다면서 다음에 다시 그리이스에 관광 와서

자기를 찾으라고 했다.

한국 오게 되면 연락하라고 내 전화 번호를 건네 줬다.

40분쯤 달려서 아테네 공항에 도착해서 예약된 비행기표도 찾아 주고 파리에서 바꿔 타는 방법도 친절히 가르쳐 주었다.

오후 12시 35분 발 에어 프랑스 AF 1233호 이었다.

오후 3시쯤 프랑스 파리 샤롤 드골 공항에 도착했다.

어쩌다 내가 파리 땅까지 밟게 되다니....

카타리나씨가 가르쳐 준대로 “트란지트 꼬래” 라고 물으면서 한국행 비행기를 타는 게이트에 다다라서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파리 도착을 알리고, 그리이스 가이드에게 전화해서 우리 일행들에게 무사 파리 도착을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5시간 이상을 게이트 C87 앞에서 기다리기가 무척 지루하고 힘들었다.

그래도 그 경황에 다른 외국인에게 손짓으로 부탁하여 사진까지 찍었다.

 

 

9시 20분 대한 항공 KE 902에 탑승했다.

열흘만에 접하게 되는 기내 TV의 뉴스와 우리나라 신문이 무척 반가웠다.


4월 27일 (목)

12시간 이상 걸려서 오후 3시가 지나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리무진을 타고 서울역으로 가서 오후 5시발 KTX를 타고 대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