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해외)

성모 발현지 성지 순례(파티마, 루르드, 바늬) - 2008년도

김혜란골롬바 2012. 5. 30. 13:50

 

4월 14일 (월)

2년 만에 다시 떠나는 성지 순례이다.

2004년 이집트, 이스라엘, 이태리 순례와 2006년 터키, 그리스 순례에 이어

이번엔 성모 발현지 위주인 파티마, 루르드, 바늬의 성지 순례로 해외 성지 순례는

이 정도에서 만족해도 될 듯 하다.

 

2006년 터키 그리스 순례 중 엄마께서 갑자기 돌아가셨기에 이번에는 무사히 끝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9일 기도를 바치면서 나름대로 준비를 해 왔었다.

 

올해가 성모님께서 루르드에 발현하신지 150년이 되는 해여서

 교황님께서 희년을 선포하시고, 전대사의 은총을 주신 이 때에

이렇게 다시금 순례 길에 오르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 드리며

순례할 수 있도록 협조해 준 남편에게도 감사 드린다.

 

오전 6시 조카 신부님(김 상열;토마스 아퀴나스)께서 계시는 고성 성당에서

전세 버스로 인천 공항을 향하여 출발했다.

일교차가 15도 이상이라는 일기 예보대로 새벽 공기가 무척이나 쌀쌀했고

 안개가 자욱했다.

 

주로 고성 성당 신자와 조카 신부님과 동기이신 한 재상(요한) 신부님께서 계시는

사동 성당 신자 7분과 조카 신부님 모친인 사촌 올케 언니(한 정숙;세실리아)와

조카 신부님 외삼촌(한 춘;요한), 조카 신부님 누나(김 귀주;세실리아)와

인솔자인 가톨릭신문 투어 직원 이 정택(안드레아)씨를 포함하여 32명이 우리 일행이었다.

 

오전 10시 30분 인천 공항에 도착하여 출국 수속을 밟고 면세점을 둘러보며

시간을 보내다가 오후 1시 35분 암스테르담행 KLM 866 비행기를 탔다.

역시나 비행기안에서의 시간은 고통스러울 만큼 지루했다.

무려 11시간 30분 만인 한국 시간으로 새벽 1시 쯤에 암스테르담 공항에 도착했다.

 

인원 파악을 쉽게 하기 위하여 4개로 조를 짰는데

나는 조카 신부님을 조장으로 하는 2조에 속했다.

 

3시간을 기다렸다가 이 곳 시간으로 오후 9시 KL1697 편으로 3시간을 날아서

포르투칼 리스본 공항에 도착했다.

 

현지 가이드 임 경일(파블로)씨가 우리들을 반가이 맞아 주었다.

대구 고성 성당을 출발한 지 무려 26시간만에 우리들은 리스본 Marriott Hotel에 투숙했다.

우리들에게는 4월 14일은 하루가 24시간이 아니라 32시간이었다.

 

 

 

4월 15일 (화)

아침 식사 후 오전 9시 성 안토니오 생가로 향했다.

도착 즉시 순례지에서의,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첫미사를 드렸다.

성당 옆 방이 성인께서 태어나신 곳이라 했고

 제대에는 성인의 손가락 뼈가 보관되어 있었다.

 

성인께서는 1195년 8월 15일에 태어 나시어 1231년에 선종하셨는데

선교 중 잘못 들른 시실리 섬에서 만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과 공통된 점이 많다고 했다.

귀족 출신이었지만 “왕의 기사가 되고 싶지 않고 가난한 사람을 돕고 복음을 전하는 하느님의 기사가 되고 싶다.”고 선언하고 집을 나오셨단다.

 

성상에는 아기 예수님을 안고 계신 모습이 많으며,

 강론을 잘 하시는 분으로, 주로 시편을 강론 자료로 삼았는데

프랑스 리비니에서는 물고기에게까지 설교를 하시어

 물고기들이 줄을 지어 성인의 강론을 경청했단다

.

물건을 잃어 버렸을 때에 성인께 간청하면 잘 들어 주셨다 했고,

미혼 여성의 결혼을 잘 이루어지게 하시는 성인이라 하여

성인의 축일인 6월 13일에는 이 성당에 미혼 남녀들의 줄이 이어진단다.

글쎄 우리 큰 딸에게도 효험이 있을까?

 

 

 

포르투깔은 “고요한 항구”라는 뜻이며,

 리스보아라고도 하는 수도 리스본은 노아의 증손 “리시아가 살던 땅”이란 뜻이라고 했다.

크기는 한반도의 5분의 2이며, 인구는 1035만명이나 약 500만명이 해외 이주자란다.

 

우리 나라에서는 병아리 감별사, 태권도 사범 등으로 진출한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인사말은 “올라”로 통하고, “감사 합니다”는 여성에게는 “오브리가다”,

남성에게는 “오브리가두”라고 하며, 헤어질 때는 “차오”라고 한단다.

비누의 경상도 사투리로 알고있는 “사분”과 일본말로 알고있는 “꼽부(cup)”, “빵”등이

그대로 포르투갈 말이라고 했다.

 

포르투갈은 축구(Foot ball)의 강국이며, 슬픈 노래의 제목인 "Fadou"가 유명하고,

성모 발현지인 “Fatima” 있어서 “3F”의 나라라 한단다.

 

버스를 타고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몇 개의 광장을 지나며 시내 관광을 했다.

대리석 생산의 강국이라는 명성답게 거리는 대리석 조각들로 만들어져 있었으며,

 아주 조용하고 높은 건물도 별로 없는 듯 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를 닮은 길이 3200m, 높이 190m의

유럽에서 가장 긴 다리가 있었는데, 혁명이 일어난 날을 기념하여 “4월 25일교”라고 한단다

그 다리 위 쪽으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브라질 예수 성심상에 지지 않을 만큼

큰 예수님상(높이 109m)이 리스본 항구를 내려다 보며 서 있었는데,

 이 예수님상은 남편이나 아들을 전쟁터에 보낸 여인들의 성금을 13년간이나 모아서 만든 것으로서, 제2차 세계 대전의 피해가 없음을 감사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진 평화를 상징하는 조각품으로 그리스도께서 두 팔을 벌려 평화를 기원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국제 문화 학술 대회가 열린다는 벨렘(베텔레헴에서 유래된 말) 문화 센터를 지나 (그 건물 앞에는 아주 멋진 큰 분수가 있었다.)

예레니모 수도원과 이어져 있는 산타 마리아 대성당을 둘러 보았다.

 

이 성당은 1502년부터 70년동안 건설 되었다는데 건물 길이가 300m나 되는 수도원 건물이 지진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는데 이 성당만은 내부에 세워진 석회암으로 만든 8개의 기둥이 천정에까지 야자수 모양으로 퍼져 버팀목이 되어주었기에 안전했단다.

이 양식을 이 성당을 지은 마뉴엘 왕의 이름을 본따서 마뉴엘 양식이라고 했다.

이 곳은 항해사들이 항해 전에 미사를 봉헌하는 장소로서

기둥에 밧줄과 해초를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이 특색이었다.

 

 

강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넓어서 바다로 오해한다는 태쥬강변,

에로니모 수도원 앞에 위치한 벨렘탑은 “지리상의 발견시대”에 배가 출항하던 곳이며,

강변 광장 바닥에는 포르투갈을 중심에 둔 세계 지도가 크게 새겨져 있었는데,

포르투갈 인들이 항해하여 도착하였던 세계 각 지에 연도가 새겨져 있어

포르투갈인들의 발길이 머물렀던 곳이 방대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가이드의 지시대로 일본 나가사끼에 1541년이라고 씌여진 곳을 모두들 발로 밟아 버렸다.

 

점심 식사 후 1시간 반을 달려 리스본 북 쪽 141Km 지점에 있는 작은 도시 파티마에 도착했다.

파티마는 1917년 5월 13일부터 10월 13일까지 매월 13일에 여섯 번을 계속하여

당시 9살, 7살, 6살의 가난한 세 목동들(루시아, 히야친타, 프란치스코)에게 나타나신 곳이다.

먼저 세 아이들 생가 동네에 마련된 15처 앞에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조별로 선창을 하며 바쳤다.

 

진흙으로 빚어 도자기 형식으로 구워 채색을 한 것이라 했다.

15처가 끝나는 곳에 항가리 대사관에서 스테파노 성인에게 봉헌한 성당이 있었는데

그 옥상에는 돌아가신 예수님의 십자가상이 강도의 두 십자가와 함께 세워져 있었다.

십자가의 길 기도를 다 바치고 내려오는 길에 조별 성가 경연 대회도 했다.

 

루시아 수녀님의 생가와 수녀님의 사촌 남매인 프란치스코 히야친타의 생가도 둘러 보았다.

수녀님께서 갓난 아기 때 6개월 간 누워 있었다는 나무 바구니 모양의 작은 침대도 아직 보관되어 있었고, 프란치스코의 집에는 곡식을 저장하는 광과 관으로 빗물을 모아서 우물처럼 만들어 놓은 것 등이 그 때의 생활을 그대로 보여 주듯이 잘 보관되어 있었는데, 수녀님 사촌 언니라는 분이 관리하고 있었다.

 

이 생가 터에는 성모님께서 2번째 발현한 곳이라 했다.

 

도미니코 수녀원에서 경영하는 피정의 집 비슷한 호텔에 투숙하여

저녁 식사 후 숙소에서 10분 쯤 걸어 성모님 발현 소성당과 대성전(바실리카)이 있는

수용 인원이 15만 명이나 된다는 큰 광장에서 하는 묵주 기도와 촛불 행렬에 참석했다.

 

오늘은 11개국에서 2000명쯤의 순례자들이 참석 했단다.

그 중 6개국 대표들이 단상에 올라가 묵주기도 주송을 했는데

우리 팀에서는 부부이신 남 상복(살레시오) 형제님과 정 수경(도로테아) 자매님께서

4단을 우리 말로 주송하였다.

마치 내가 주송하는 것처럼 온 몸에 전율이 일 정도로 감격스러웠다.

서로 서로 자기 나라 말로 하는 묵주기도가 전혀 혼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이 자체가 큰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묵주 기도 후 꽃가마 위에 파티마 성모상을 모시고 손에 손에 촛불을 들고

광장을 돌며 행렬을 했는데 그 모습 또한 장관이었다.

 

숙소에 돌아와서 씻고 누우니 이 곳 시간으로 밤 12시가 가까웠다.

 

 

4월 16일(수)

아침 식사 후 오전 9시 30분 어제 밤 묵주기도를 하던 성모 발현 소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이 곳은 성모님께서 5번이나 발현하신 곳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감실이

기와 지붕을 얹고 집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돌아가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저격범에게 총을 맞으신 후

 총알을 이 곳에 봉헌하고, 안전하게 보호해주심을 감사하신 곳이라 했다.

 

“베네디 카무스 도미누스 데이 빠테드 엣 필리 엣 스피티 상티. 아멘.”

함께 미사 참례한 다른 나라 순례객들을 위하여 라틴말로 강복을 주시는

한 신부님의 모습이 너무나 멋지게 보였다.

 

미사 후 파티마 대성전 안에 들어 갔는데,

전면 양 쪽으로 14처가 대리석으로 모자이크되어 붙어 있었다.

중앙 제대 오른 쪽에는 1917년 선종하신 프란치스코의 무덤이 있었고,

왼쪽에는 루시아 수녀님과 히야친타의 무덤이 있었는데,

1920년 히야친타의 묘를 만들 때 미리 수녀님의 가묘를 만들어 놓았다가

2005년 2월 13일 선종하신 후 이 곳에 안장 되셨단다.

 

 

대성전 맞은편 광장 가에 신성전이 세워져 있었는데,

고전풍의 대성전과 달리 큰 공연장처럼 현대식으로 멋있게 지어져 있었다.

 

성전 전면에는 유명한 성서 구절들이 우리 나라를 비롯한 여러 나라 글자로 새겨져 있었고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12개의 문에는 각각 12사도의 모습이 사도들 이름과 함께

조각되어 있었다.

 

 

광장을 가로 지르는, 두 성전을 이어지는 길은 “속죄의 길”이라 하여

순례자들이 무릎으로 걸으면서 기도하고 있었다.

파티마의 성모님께서 죄인의 회개와 함께 인류의 평화를 위해 묵주 기도를 바칠 것을

호소하신대로 우리의 전구를 들어 주시어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그 장벽의

한 부분(큰 비석 크기)이 유리벽 속에 보관되어 있었다

 

 

광장과 숙소 사이의 길에는 한 평도 될까 말까한 작은 성물방 가게들이 총총히 붙어 있었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 점심 식사를 하고 오후 1시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 북쪽 180Km

떨어진 곳에 있는 살라망카로 향했다.

국경을 지나면서도 어떤 출입국 절차도 없었으며,

이 전세 버스를 프랑스 루르드까지 이용한단다.

 

포르투갈에서 스페인으로 가는 길은 넓은 보리밭과 이제 막 싹이 돋기 시작하는

해바라기 밭들이 번갈아 드문드문 이어져 있었고,

 스페인 말로 “찰렛”이라고 하는 예쁜 전원 주택들이 보였다.

6,7월겅에 이 해바라기 꽃들이 활짝 필 때면 얼마나 예쁠까?

 

스페인은 “스팬”이라고도 하는데, 어원은 지도에 나타난 모양대로 “손바닥”이란 뜻이란다.

“노인과 바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의 배경으로서 투우로 유명하며,

관광의 대국으로 연간 400억불 이상의 수입을 올리고,

베레모가 최초로 생긴 나라이며 들토끼도 많고,

또 세계에서 올리브 나무가 가장 많은 나라인데 3억 2천만 그루나 심어져 있다고 한다.

5분의 추기경이 나왔으며 68개의 교구와 7개의 대주교좌 성당을 가졌으며

인구의 99%가 가톨릭 신자란다.

 

스페인 말로 “감사 합니다”는 “그라시아스”, 헤어질 때는 “아디오스”,

“물(water)은 ”아구아“로 통한단다.

 

4시간 이상을 달려서 오후 7시 30분에 저녁 식사를 한 후

살라망카 Horus Oasis Hotel에  투숙했다.

 

 

4월 17일(목)

이 곳이 해발 803m에 위치하는 고지대라서 평균 기온이 낮으니 옷을 두껍게 입으라는

 가이드의 말대로 아침에 일어나니 정말 쌀쌀한 날씨에다가 비까지 뿌리고 있었다.

아침 식사 후 버스 안에서 성무일도를 바치면서 순례 길에 나섰다.

 

성녀 대데레사 수녀님께서 1572년 1월 25일 8번째 창건하신 수녀원에 가시기 위해

도보로 걸어 가신 길을 우리들은 버스를 타고

살라망카에서 동 쪽으로 20km 떨어진 작은 마을 "알바 데 또르메스"라는 곳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걸어 가시다가 쉬시던 샘 가를 지나게 되었다.

성녀께서 어느 날 이 샘터 나무 밑에서 잠시 쉬시는 중 벼락이 떨어졌는데

 이 벼락 맞은 나무에 십자가가 새겨 졌단다.

 

안토니오 신부님 집전으로 병자 성사를 받은 후

1582년 10월 4일 밤 9시 “나는 성교회의 딸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님이시여,

이제 우리가 만날 때가 되었습니다“ 하고 말씀하신 후

이 곳 알바 데 또르메스에서 67세를 일기로 선종하셨는데,

성녀의 무덤에서는 항상 꽃향기가 났으며,

까르로스 3세에게서 대리석을 기증 받아 이장하려고 관 뚜껑을 열어보니

아직 온기가 가시지 않았다는 증언이 있다고 했다.

 

이 곳 수도원의 유물관에는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썩지않은 성녀의

심장과 왼팔이 진공 상태로 보관 되어 있었고,

십자가가 새겨진 벼락맞은 나무 조각과 성녀가 쓰시던 수저를 비롯한 비품들과

성녀의 저서인 “완덕의 길”과 자서전의 필사본이 보관되어 있었다.

 

심장과 왼 팔을 제외한 다른 유해는 기념 성당 중앙 제대에 안치되어 있었다.

돌아 가시기 이틀 전까지 미사드리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고자

성당 안으로 통하는 창이 있는 방과, 선종 하셨던 방도 그대로 보존 되어 있었다.

 

신심이 돈독하고 애기를 낳지 못하는 “데레사 데 라이즈” 라는 부인이

안드레아 성인께 애기를 낳게 해 달라고 부탁드리자,

다른 곳에서 애기를 갖게 될 것이라는 대답을 듣고 이 성당을 지었단다.

그래서 성당 안에는 이 부부의 무덤이 있었고,

유물관에는 예수님과 성모님의 모습을 닮게 그린 이 부부의 초상화가 있었다.

 

바로 옆에는 십자가의 성 요한 수도원이 있었는데

1982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이 곳을 방문 하셨단다.

 

 

 

 

살라망카 대성전(바실리카)

투우장, 종교 재판의 처형장 등으로 사용 되어 왔던 “쁠라사데 마이아르”라는

중앙 광장에 있는 시청 맞은 편에 세워져 있었다.

 

로마네스크 양식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며, 외부의 조각이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1232년에 20년 동안 걸려서 건축했으나 1755년 경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그 후 다시 축조한 것이란다.

 

제대화 대신 6명의 천사들의 옹위를 받는 성모님을 모셔 놓았고,

90개의 창문이 있으나 창문에 스태인드 글라스가 없는 바로코 양식의 건물이라 했다.

천정에 있는 지름 80m의 돔 안에는 성모님의 일생이 8가지로 조각되어 있었는데,

올려 쳐다 보기 힘들다고 고개만 숙이면 확대경으로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특히 “전구의 성모님”으로 우리의 기도를 잘 들어 주신다고 했다.

 

 

“아베 마리아”란 말은 예로니모 성인이 제일 먼저 사용했다는데

“아베”란 “기뻐 하소서”란 뜻이라고 가이드가 덧붙여 설명해 주었다.

 

근처에는 야고보 사도의 무덤을 찾아가기 위한 순례자들의 숙소가 있었는데

벽에 조개를 붙여 장식했다 하여 “조개의 집”이라 한단다

 

우리들은 건너편 클레레시아 교회 계단에 서서 가이드의 지시대로

“자모신 마리아”“오 필승 코리아”를 불렀더니

근처 관광객을 비롯한 사람들이 박수를 쳐 주고, 사진을 찍기도 하는 것이었다.

 

 

식당에서 양고기가 나오는 점심 식사를 하고 1시간 반을 달려, “성자의 도시”라고 일컫는 아빌라로 향했다.

아빌라는 해발 1130m로 우리 나라 대관령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고 했다.

 

둘레 12m, 두께 3m나 되는 88개의 망루를 갖춘 2250m나 되는 성곽에 둘러 싸여 있었는데,

이는 알퐁스 6세 시절에 이슬람의 침략을 막기 위해 사위인 라이문도라는 사람이 만들었단다.

성녀께서 어린 시절 선교를 하기 위해 동생을 데리고 가출하셨던 장소에는

4개의 기둥 안에 십자가를 세워 놓고 “선교자의 언덕”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오후 4시 30분 성녀의 생가 터에 세워진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오늘 전례는 우리 2조가 맡아서 했다.

 

“제가 아빌라에서 이렇게 미사를 드리게 될 줄은 정말 몰랐읍니다.”

라는 조카 신부님의 강론 서두 말씀처럼 내가 아빌라의 대데레사 성당에서

미사 해설을 맡게 될 줄은 나 역시 정말 몰랐었다.

 

미사 후 유물관을 둘러 보았다.

1562년 8월 24일 성 요셉 수도원을 창건 하신 후, 1582년 4월 19일 Burgos 수도원을 창건하시기 까지 무려 17개의 수도원을 설립 하셨단다.

우리 레지오 단원 윤 방우(대데레사) 형님이 생각나서 작은 성녀상 하나를 샀다.

 

 

오늘은 날씨도 궂고, 너무 쌀쌀 한데다 그 동안의 여독을 풀기 위하여 다른 날보다 일찍

" Palacio Vaberrabanos Gran Hotel"에 투숙했다.

 

 

오후 8시 30분 저녁 식사 시간까지 자유 시간이 주어졌기에 귀주는 근처 상점 구경 나가고 나는 새벽마다 못 이루는 잠을 보충했다

 

 

 

4월 18일(금)

아침에 일어나니 여전히 비는 오락 가락하고 있었고, 날씨 역시 무척 쌀쌀했다.

 옷은 얇은 것만 한 가방 챙겨 왔으니 여러 겹 포개 입을 수 밖에 없었다.

 

아침 식사 후 살라망카에서 220Km 떨어진 중세 도시 똘레도로 향했다.

똘레도는 마드리드 남 쪽으로 약 72Km 지점에 있는,

11세기부터 16세기까지 거의 500년동안 스페인의 옛 수도로서(필리비 2세때 마드리드로 옮겼다 함) 따호 강이 굽어 흐르는 이베리아 반도의 중앙 부분에 위치하며,

3면이 강에 둘러 싸여 있어 “안전 지대”라는 라틴어에서 유래 된 어원대로

 난공 불락의 요새같은 도시라 했다.

어머니와 같은 포근함을 주는 정신적 총본산이 되는 곳이란다.

 

순례 첫 날 가이드 파블로씨가 이번 성지 순례의 주제는 “태쥬에서 따호를 지나

루르드 성모님께로” 하더니 그 말이 이해가 되었다.

 

 

 

똘레도는 약 3000년의 역사를 가진 살아 있는 유적 도시로

유대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가 서로 종교와 언어를 인정해 주며 평화롭게 살았기에

그리스도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공존하는 과정에서 모자라베, 무데하르 등의

 예술 사조를 탄생 시키기도 했단다.

 

도시 전체가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어서

1560년 경의 도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주민들이 사용하는 전자 제품의 35%를 우리 나라의 LG와 삼성이 장악하고 있다고 했다.

 

십자가의 성 요한 성인께서 9개월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하시면서

 “영혼의 찬미가”란 책을 저술한 곳이라고 했다.

 

똘레도 가는 길에 300m 높이의 대형 십자가가 있었는데,

이는 스페인 내란 후 4만 명이나 되는 무명 용사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관리하고 있다고 했다.

 

 

 

 

똘레도 대성당(Catedral; 주교좌 성당)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전, 영국 런던 세인트 폴 교회, 스페인 세비아 교회 다음으로

세계에서 4번 째로 큰 성당으로 266년 간의 공사 기간을 거쳐 1493년에 완공되었으며,

 길이 113m, 폭 57m, 중앙의 높이가 45m로 완공된 후에도 몇 차례의 증, 개축을 하여

 511년 만에 지금의 모습이 만들어 졌단다.

 

중앙 제단은 예루살렘을 향한 동쪽에으로 두고 있었는데,

44개의 조각으로 이루어진 중앙 제단의 정교한 채색 조각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며,

역대 주교님들의 초상화, 9개월 이나 걸려 완성된 천정화, 엘 그레꼬의 “베드로의 눈물” 등 많은 유명 화가들의 걸작품들이 있었다.

 

중앙 제단 뒤에는 “토란스하렌테”라고 부르는 대리석의 바르크조의 조각들이 있었는데,

이 곳만 외부의 빛이 들어 오게 되어 있기에 대리석으로 조각된 무수한 천사들은

빛을 받으면 마치 약동하는 것처럼 보인단다

.

보물실에 있는 많은 금 은 재보 중 높이 3m, 무게 180Kg이나 되는 16세기의

 “알페의 성체 현시대”는 일년에 한 번씩 전시실 밖으로 옮겨

성체 거동 행렬이 이루어지는데, 짊어지고 가는 사람들 중 한 사람만은 꼭 대대로 내려오는 레위 지파 중에서 뽑고,

다른 사람들은 짊어지는데에 뽑히기만 해도 가문의 영광으로 여긴다고 했다.

 

보통 수직으로 서 있는 파이프 오르관의 파이프가 이 곳에는 수평으로 된 것들도 있었다.

오늘 미사는 11시 30분에 22개나 되는 소성당 중의 하나에서 봉헌되었다.

미사를 집전하신 한 신부님께서는

“가톨릭의 하느님을 믿는다는 게 이렇게 좋을 수가 없네요.”

라는 말씀으로 강론을 시작하셨다.

 

점심 식사 후 똘레도 시가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전망대에서 사진 촬영을 했다

 

 

 

오후 5시 오락 가락 하는 비를 맞으며, 스페인 왕궁을 둘러 보았다,

출입할 때는 비행기 탈 때처럼 검문 검색이 철저했다.

역대 스페인 국왕들의 공식 거처로 사용되었던 스페인 왕궁은 자금성, 러시아 왕궁

 다음 가는 큰 왕궁으로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로코식 왕궁 중의 하나라고 했다.

 

한 면의 길이가 140m나 되는 장방형 건축물로 2800여 개나 되는 방이 있다는데,

우리들은 그 중 24개의 방을 둘러 보았다.

어마머마한 규모와 화려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특히 거대한 천정화와, 같은 모양이 하나도 없는 샹들리에,

방마다 다른 색깔과 다른 무늬의 화려한 벽지 여러 가지 시계들이 눈을 뱅뱅 돌게 만들었다.

 

알현실에는 12개의 거울이 있었는데,

이는 4개 대륙과 4계절과 신중, 용기, 온화, 정의를 의미 한단다.

 

“저기 저 자리가 바로 노무현 대통령께서 서 계시던 곳입니다.” 라는 가이드 파블로씨의

말에 우리들은 모두 웃었다.

지금도 공식 행사에 사용되고 있으며,

공식 행사가 없는 날에는 일반 관광들에게 개방되고 있다고 했다.

 

 

   

저녁 식사는 집 떠난지 처음으로 하는 한식이어서 모두들 맛있게 먹었다.

호텔로 가기 위해 마드리드 시내로 들어오고 있는데 시내 설명을 하고 있던 파블로씨가

느닷없이 한 약국을 가르키더니 “저 약국을 보십시오. 저 약국 옆이 바로 파블로의 집입니다.” 하여 모두들 웃었다.

 

2005년 Burgos에서 5명의 스페인 사람들과 같이 영세를 받고 ,

결혼 한지 1년 반 밖에 안 되는데 비로소 3주 만에 오늘 밤 천사를 보게 되었다고

좋아하는 모습이 얼마나 천진스럽게 보이던지.....

여러 사람들 앞에서 자기 부인을 스스럼없이 천사라고 부르는 파블로씨의 마음이

너무 순수해 보였고, 남편에게서 천사라고 불리워지는 그 부인은

얼마나 마음이 예쁘고 행복한 여인일까? 하고 생각 되었다..

볼수록 우리 범물 성당 보좌 신부님인 이 억수(필립보) 신부님을 연상케 하는 모습과

야물딱지게 잘 해내는 설명들로 우리 모두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Trips Hotel에 들어 와서 가방을 풀어 놓은 후 귀주와 함께 주위의 가게들을 둘러 보았다

스페인 사람들은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 또 먹기 위해서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하루에 5번의 식사와 점심 식사 후 오후 4시 까지는 아예 가게 문 닫고 낮잠 자는 시간이며, 다른 가게들은 저녁 8시만 되면 영업을 그만 두는데,

밤 10시 이후부터 식당과 술집은 북적거리는 밤 문화가 발달된 곳이란다.

그래서 나가보니 옷가게들은 거의 다 문을 닫으려고 하고 있었다.

 

 

4월 19일 (토)

아침에 일어 나니 오늘 역시 비가 오고 쌀쌀한 날씨였다.

매일 같은 옷만 입고 사진 찍기 뭐해서 귀주 옷을 빌려 입었다.

이 곳 스페인은 연간 강우량이 500mm 밖에 안 될 정도로 비가 귀한 곳이라는데, 하필이면 우리가 와 있는 이 때에 이런 날씨라니....

호텔 로비에서 본 신문에 우산을 들고 늘어선 사람들의 사진이 실려 있는 걸 보니

이곳에서 비오는 날씨가 큰 뉴스감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아침 식사 후 호텔을 나서서 쇼핑 센터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다가 11시에 예약된

프라도 미술관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라만차 거리에 있는 스페인 광장에 들렀다.

에스파냐의 대표적인 작가 세르반테스의 서거 30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기념비와 동상이 있었고, 제일 꼭대기에는 4사람이 책을 읽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파블로씨 말로는 그 책이 바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란다.

중간에는 가문의 문장과 세르반테스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었고, 땅위에는 애마 로시난데를 타고 칼을 휘두르는 돈키호테와 산쵸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다.

 

 

 

프라도 미술관에 가니 무척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입장 시에는 어제 스페인 왕궁보다 더 까다로운 검색을 받았다.

파리 르브르 박물관, 영국 대영 박물관과 함께 세계에서 손꼽히는 미술관으로서,

회화만 3000여점 이상이며, 500여점에 이르는 조각들, 4000점에 이른 고야의 판화,

스케치 등은 빼놓을 수 없는 프라도 미술관의 중요한 콜렉션이라 한다.

 

대체로 성화에 사용하는 5가지 색깔은 빨강, 초록, 노랑, 파랑, 흰색인데,

빨강은 희생, 순교, 피를 상징하고, 사도 요한을 상징하는 초록은 희망을 상징하며,

바티칸 국기에 있는 노랑은 믿음과, 천국을 상징하고

무염시태를 나타내는 파랑은 순결을 상징하며,

하늘의 영광을 나타내는 흰색은 빛과 성령, 비둘기를 상징 한단다.

 

훌륭한 작품에 사인이나 낙관이 없는 이유는 작품 속에 자기 얼굴을 그려내는 방법을

쓰기도 하고, 제자들과 같이 하는 공동 작업이 많았으며,

화가의 특성이 워낙 뚜렷하므로 사인의 필요성이 없어서란다

 

단체 관람객에게 지정된 한시간 동안 수박 곁핥기로 파블로씨의 속사포 같은 설명을

들으며 겨우 몇 작품만 볼 수 밖에 없었다

 

고야의 “마술사의 밤잔치”, “자이얀츠”를 파블로씨의 설명을 곁들여 감상했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란 작품을 보았는데,

이 작품에서 화가는 빛과 공기를 이용하는 현대적 원근법을 사용했으며,

모델의 눈 속에 비친 것을 그렸단다.

“박쿠스”란 작품에서는 귀족만 모델로 삼던 당시의 풍습에서 벗어나 서민을 모델로 썼단다.

 

"프라도 미술관"

 

한식으로 점심을 맛있게 먹은 후 오후 1시 30분 영화 “엘 시드“의 배경 도시인

부르고스로 향했다.

부르고스 대성당은 스페인에서 세번째로 큰 대주교좌 성당으로서 1113년에서 1765년까지 무려 542년만에 주민들이 성금을 모아 석회암으로 만들어졌는데,

1984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 되었다네.  

 

오후 5시 대성당 안에 있는 산토크리스트 소성당에서 미사를 드렸다.

 

부르고스 대성당과 산티아고로 가는 지친 순례자가 의자에 주저 앉아 쉬는 조각상

 

 

제대에 나무로 만든 큰 십자가가 있었는데 나무에 있는 옹이를 그대로 이용했기에

매맞아 피흘린 자국처럼 보여 스페인에서 가장 고통을 격렬하게 표현한 예수님으로

유명한데 치마를 입고 계신게 특이했다.

12제자들 중 가장 먼저 순교하신 야고보 성인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를 갈 때

반드시 거쳐야 되는 곳이란다.

 

 

 

미사를 마친 후 피레네 산맥에서 야고보 사도 무덤까지 800km나 되는 거리를

순례자들이 40일 동안 걸어 간 길에는 길을 찾기 좋도록 드문드문 금속으로 만든

가리비 같은 조개 껍질 모양을 붙여 놓았는데, 우리들도 그 길을 따라 잠시 걸어 보았다.

 

 

500m마다 집 벽에도 조개 모양의 금속을 하나씩 붙여 놓았고,

하루에 한 번씩 순례자임을 확인 받는 집도 40군데나 있다고 했다.

 

오후 6시 반 Fernan Gonzalez Boutique Hotel에 에 도착하여 방을 배정받고, 근처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식당에서 몇 몇 교우들의 가요와 한 신부님의 “O sole mio" 노래를 듣고,

흥겨운 마음에 식당 앞 광장에서 둥글게 서서 손에 손을 맞잡고

“아리랑”, “오 필승 코리아”등의 노래를 부르며 흥겹게 놀았다.

지나가던 외국인들도 우리들을 즐거운 표정으로 봐 주었다.

 

 

 

 

4월 20일(일)

한숨 깜박 자고 나면 잠이 깨어서 뒤척이다가 새벽 4시쯤이면 일어나서

룸메이트 깰까봐 살짜기 화장실로 들어가서는 변기 위에 큰 타올을 깔고 앉아

기도 드리고 전날 기행문 쓰는게 이젠 일과처럼 되어 버렸다

 

 

아침 식사를 하고 오전 8시 30분 스페인에서 가장 먼저 건설되었다는

A-1 고속 도로를 타고 험란한 산악 지대를 지나서

“빠위스테 바스코”라는 철광석과 석탄, 조립 소형차 공장이 많은 공업 지대를 지나 가장 아름다운 휴양도시라는 산세바스티아를 거쳐서

3시간 만에 예수회의 창시자인 이냐시오 성인의 생가가 있는 로욜라에 도착했다.

 

이냐시오 성인은 고등학교 때 세계사 시간에 귀익혀 들어온 분으로서

우리 나라에는 서강 대학교와 광주 가톨릭대학이 예수회에서 설립되었단다.

 

1491년 부유한 귀족 출신으로 11남매 중 막내로 출생한 성인께서

군인이 되신 그가 전쟁에서 입은 다리 부상을 치료 중일 때

현세의 허무함을 깨닫고 있던 중에,

아기 예수님을 안으신 성모님을 만나 뵙고는 회심의 계기가 되어

늦은 나이에 신학 공부를 시작하여 46살에 사제가 되었고,

이후 동료들과함께 예수회를 설립하여 오랫동안 예수회 총장을 맡았단다.

 

성인께서는 성모님을 뵙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칼을 봉헌하였으며,

밖으로 나와 처음으로 만난 기사에게 자기의 기사 옷을 벗어 주었으며,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32살 때 어린 학생들과 같이

바로셀로나에서 라틴어 수업까지 받았단다

 

성모님을 만났던 그 장소에서

우리들은 오전 11시30분에 부활 5주일 미사를 봉헌했다

 

생가 3층을 오르내리면서 군데 군데 한국말로 된 설명이 나오는 곳에서

성인의 생활 모습과 행적들을 들었고,

유물관에서는 그림으로 또 모형으로 만들어 놓은 성인의 일상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곳에서는 한 사람도 예수회 사제가 안 나왔다니......

 

 

점심 식사 후 피레네 산맥 기슭 해발 423m에 위치한 작은 도시 루르드로 향했다.

그런데 포르투갈에서부터 일주일 동안 우리들과 같이 지내 왔던 파블로씨와

여기서 헤어져야 한단다.

그동안 순례했던 일들을 한숨에 주욱 요점을 나열해 주고는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아는 것도 너무 많고 설명도 너무 잘 해 주었는데, 그리고 그 새 정도 많이 들었는데

이렇게 헤어지게 되어 무척 섭섭했다.

오늘 밤 마드리드에서 천사와 보내고, 내일부터 다시 포르투갈 리스본을 찾는 다른 순례자들과 보내야 된단다.

산세바스티아에 파블로씨를 내려 주고, 우리들은 루르드를 향해 다시 달렸다.

 

프랑스 국경 지대에 들어서자 피레네 산맥 산 꼭대기에는 만년설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고, 유채꽃이 노랗게 피어 있는 벌판이 너무나 예뻤고 초원에는 한가로이

소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루르드로 가면서 인솔자 이 정택(안드레아)씨로부터 루르드 성모 발현 얘기를 들었다.

국도에서 속도 위반을 했는지 프랑스 경찰차가 따라와서 잠시 지체하더니,

루르드에 와서는 호텔을 못 찾아서 루르드 시내를 구석 구석 돌아다녀

덕분에 루르드 골목까지 다 구경한 것 같았다.

 

항상 웃는 얼굴로 리스본에서부터 우리를 태우고 다녔던 운전 기사 안토니오씨와도

아쉬운 작별을 나누었다.

 

Mercure Accor Hotel에 도착하니 이 곳에서 봉사하고 계신 예수 성심회 소속

유 세실리아 수녀님께서 우리들을 반가이 맞아 주셨다.

 

 

 

4월 21일(월)

이 곳 프랑스에서도 비 오고 쌀쌀한 날씨는 계속 되었다.

아침 식사 후 유 세실리아 수녀님과 함께 순례에 나섰다.

성모님 발현 150 주년을 맞아 희년이 선포되고

이 곳을 방문하는 사람에게 내려지는 전대사를 받기 위하여

 4단계로 나누어 목에 걸 수 있는 패에 스티커를 붙여 가면서 다녔다.

 

 

먼저 벨라뎃다 성녀가 1844년 1월 9일 태어나서 이틀 만에 세례를 받았던 곳에 갔다.

수녀님의 설명을 듣고 나서 돌아 가면서 세례당의 물에 손을 담그고,

“나 골롬바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읍니다.”하고

세례 갱신 서약을 했다.

 

14살 때 첫 영성체 교리를 배우고 받았던 곳에서 성녀가 성소를 찾은 곳이었단다.

“주교님 저는 할 줄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첫영성체를 받은 후 “나는 너무 행복 합니다.” 라고 말했단다.

“성모님께서 나를 택하신 것은 내가 가난하고 무지하였기 때문입니다.”

벨라뎃다 성녀의 영성은 겸손과 사랑 위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수녀님께서 말씀하셨다.

박물관에는 1858년 당시의 루르드 전경 모형이 만들어져 있었고,

성녀가 쓰셨던 두건과 머리 카락과 나막신과 만또가 보관 되어 있었다.

 

가는 곳 마다 우리들은 전대사를 얻기 위하여 사도신경과 주모경과 영광송을 바쳤다.

 

 

 

첫 번째 발현 날인 1858년 2월 11일에 성모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기도가 성호경이었단다.

그래서 그 후로 성녀께서는 매 번 성호경을 정성스레 하셨단다.

 

두 번째 발현 날인 2월 14일에는 성수를 갖고 와서 성수 한 병을 다 뿌리면서

구마경을 바쳤단다.

 

세 번째 발현 날인 2월 18일에는 엄마가 보내서 갔는데, “당신의 이름을 적어 주세요.”

했고, 성모님께서는 “저 세상의 행복을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본래 벨라뎃다 성녀 축일은 4월 16일인데,

이 수녀회에서는 2월 18일을 축일로 지내고 있단다.

 

여덟 번째 발현 날인 2월 24일

“Penitence! Penitence! Penitence! Pour les pecheurs!”

 (“회개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라!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서 기도 하라!”)

“저는 지저분했지만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땅에 친구 했읍니다.”

 

아홉 번째 발현 날인 2월 25일

“Allez bolre a la Fontaine et vous Y Laver” (“샘의 물을 마시고 세수를 하여라.”)

벨라뎃다는 샘 같은 것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손짓한 곳을 손으로 파니까

과연 물이 솟아 났다고 한다.

“더러운 물이었지만 보석하는 마음으로 물을 마시고, 얼굴을 씻었습니다.”

 

그 후 150년 동안 비가 오나 가뭄이 드나 끊임없이 매일 12만리터에서 13만 리터에 달하는 물이 흘러 나왔으니 이 사실만도 큰 기적인데 많은 병자를 낫게 하는 기적까지 일어 났단다.

난치병에 대한 이 기적수의 효능은 실로 놀랄 만한 것으로 지금까지 기적수를 마시고, 혹은 몸을 씻음으로써, 아주 희망이 없었던 병자가 완쾌된 예는 얼마나 되는지 모를 정도란다.

과학적으로 이 물의 성분을 분석 해보니 게르마늄이 많이 들어 있더라고 했다.

 

열 세 번째 발현 날인 3월 2일

“Allez dire aux pretres quon vienne ici en procession et quon y batisse une chapelle.”

성모님께서는 행렬 지은 기도를 원하셨단다.

 

열 여섯 번째 발현 날인 3월 25일

“Que soy rera. Immaculada Councepciou” (“나는 원죄 없느니라.” “임마꼴다 꼰셉시어”)

벨라뎃다가 성모님께 “오! 부인이여! 당신은 누구이시며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옵니까?” 라는 물음에 대한 성모님의 대답이었단다. 그래서 성녀는 급히 달려 가 신부님께

“임마꼴다 꼰셉시어”를 외쳤고, 이 말은 들은 신부님도 깜짝 놀라 비로소 주교님께

성모님의 발현을 보고하는 서한을 보냈다고 했다.

 

열 일곱 째의 발현 날인 4월 7일 .

기도 중 바람에 촛불이 흔들리니 성녀가 30분 동안 촛불을 감싸고 있어도 손이 말짱한

기적이 일어 났단다.

 

 

열 여덟 번째 마지막 발현 날인 7월 16일

발현 장소를 찾는 것을 금지하는 방이 붙었고, 그 방을 반대하는 탄원서가 수도 없이

들어 왔다고 했다.

 

이 후 교구의 주교는 조사 위원회를 구성하고 충분한 신학적 과학적 조사를 명하였으나, 초자연적 현상인 기적으로 인정할 수밖이 없었단다.

병자 완치는 모두가 기적이라고 할 수 없지만, 최초 55년 동안에 기적이라고 인정 되는

것이 4,445건이나 된다고 했다.

 

성녀께서는 병환 중에 1867년 10월 30일 첫 서원을 미리 받으시고,

1879년 4월 16일 35세를 일기로 선종하셨는데,

아직도 썩지 않은 성녀의 시신이 파리에서 2시간 거리에 있는 느베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오전 11시 30분 루르드에서 미사를 봉헌 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통을 받는 이들을 위하여 예물을 바쳤다.

내가 미사 해설을 하는데 너무 감격해서 자꾸 가슴이 뭉클 했는데

귀주가 신자들의 기도를 하면서 눈물을 흘려서 나도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숙소에 돌아 와 점심 식사를 급히 하고 침수 예절을 하기 위하여

 다시 미사비엘 동굴로 갔다.

동굴 제대 왼쪽 돌판 아래에 아홉 번째 발현하신 성모님의 말씀에 따라

벨라뎃다가 손으로 파 헤쳐 솟아 난 샘이 있었고,

샘 왼 쪽에 대리석 판이 있는데, 성모님께서 발현하실 때 하신 말씀이 새겨져 있었다.

 

그 말씀은 중요한 메시지로서 우리들 각자에게 하시는 말씀이었다.

“샘에 가서 마시고 씻어라” 라고 우리 말로도 새겨져 있었다.

 

휠체어를 탄 많은 장애인들과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순서가 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봉사자들이 묵주 기도를 바치고 성가를 부르도록 진행해 주었다.

몇 차례나 나에게 마이크를 대어 주어서 우리 말로 성모송 주송을 했다.

침수 예절을 잘 할 수 있도록 한 사람 당 최소한 세 사람의 봉사자들이 친절하게

도와 주었다.

 

온 몸과 마음이 깨끗이 씻어져서 새롭게 태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 드렸다.

침수 예절 후 줄지어 동굴 벽을 만지며 전대사를 얻기 위한 기도를 바치면서 걸었다.

 

루르드 대성전에 들어 가 보니 채색된 대리석 조각으로 모자이크하여

묵주 기도 15단 신비의 모습들이 아주 크게 만들어져

중앙 제대와 좌 우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1530m의 거리를 두고 언덕 위에 각 처마다 2m 높이의 쇠로 조각된 14처 앞에서

귀주와 같이 십자가의 기도를 했다.

기도를 마치고 나니 오후 4시 30분에 모이기로 한 시간에 늦어 버려서

일행들이 기다리는게 죄송스럽고 또 없어졌다고 걱정할까 봐 얼마나 뛰어서 내려왔던지

 숨이 차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오후 5시 굉장히 넓은 지하 광장에서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하는 성체 강복은 정말 장엄하였다.

수 십개의 깃발을 앞세우고 25분의 사제들과 3분의 주교님들이 입장하셨으며

분향 예절도 굉장하였다

.

국민 학교 시절 범어 성당에서 라틴말로 하던 성체 강복을 생각 하면서 “딴뚬 에르고”를

 비롯한 라틴어 성가들을 열심히 따라 불렀다.

 

 

 

저녁 식사 후 밤 9시 루르드 광장에서 하는 묵주 기도와 촛불 행렬에 참석했다.

우리 팀에서 나를 비롯한 4사람이 대표로 단상에 올라가서 우리 말로 성가를 부르고,

묵주 기도 4단 후반부를 주송하는 영광을 차지했다.

 

비가 와서 그런지 파티마에서의 촛불 행렬보다 참석 인원도 적어 성대하지 못했는데

밤비 내리는 쌀쌀한 날씨에 너무 추워서 하반신은 마비될 것처럼 뻣뻣했지만

마음만은 불 타 오르듯 기쁨에 충만했다.

 

 

 

4월 22일 (화)

아침 6시 30분 소성당에서 한 신부님 집전으로 미사를 드렸다.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미사 예물을 바쳤다.

 

신부님께서 “모든 일에 있어서 진정으로 내 탓이라고 받아 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신앙인이 될 수 있읍니다.” 라는 강론 말씀을 해 주셨다.

 

“좋으신 주님, 성모님 루르드 발현 150주년을 맞아 희년으로 선포된 이 때

이 곳을 찾는 기회를 주심에 감사드리며, 저에게 내리신 전대사의 은혜를 꼭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에게 돌려 주시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통 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라고 신자들의 기도를 바쳤다.

 

미사 후 설치 되어 있는 수도 꼭지에서 기적수를 받아 마시고,

어제 산 물통에 기적수를 받아 무겁게 들고 왔다.

 

아침을 먹고, 우리들은 이번 성지 순례의 마지막 코스인 바늬(Baneux)로 가기 위해

루르드 공항으로 갔다.

루르드 시내를 지나 오면서 어제 순례한 일들을 머리에 되새겼고,

“내 평생에 다시 루르드를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했다.

 

오전 11시 5분 AF5702편으로 루르드 공항을 출발하여

12시 35분 파리 Orly 공항에 도착했다.

파리 “봉”이라는 한식당에서 정말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오후 2시 20분 다시 전세 버스를 타고, 암스테르담, 독일 등 동유럽으로 가는 유일한 도로를 달려, 제 1,2차 대전 때 격전지였고,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로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바늬로 향했다.

 

바늬는 루베네의 관할 구역에 속하는 해발 325m 높이에 위치한

아주 가난한 작은 마을이란다.

저녁 8시가 되어서야 오늘 숙소로 쓸 피정의 집에 도착했다.

저녁을 먹고, 우리들은 성지를 둘러 보았다.

파티마나 루르드처럼 사람들이 북적거리지 않는 조용하고 자그마한 소박한 성지였다.

지원자가 없어서, 이 곳을 관리하던 수녀원이 패쇄되어 겨우 4명의 수녀님만

남아 계신단다.

 

가이드로 우리를 반가이 맞아주신 김 젬마 수녀님의 왜소하고 마른 체구와 늙으신 모습에 애처러운 마음이 앞섰다.

 

 

 

4월 23일 (수)

아침에 일어나서 커텐을 젖혀보니 파란 잔디밭이 넓게 펼쳐져 있고,

어느 새 솟아 오른 해가 구름 사이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진작 커텐을 열었으면 지평선 위에서 떠오르는 멋진 일출을 보았을텐데........

무척 아쉬웠다.

어제와 오늘 아침은 올케 언니 방에서 우리끼리 성무일도를 했다.

아침 식사 후 오전 9시 30분 성모님 발현 소성당에서 미사를 드렸다.

1월 20일 네 번째 발현에서 성모님께서 원하셨던 작은 성당을 얼마나 작게 지었던지

 제대 주위에 겨우 몇 명만 앉을 수 있도록 되어 있고, 앞 마당에 긴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제대 오른편에는 기도 드린 후 치유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버리고 간 지팡이와

보조 장구들이 있었다

모레가 엄마 2주기인데, 대구 범물 성당에 연미사를 신청해 놓고 왔지만,

오늘이 성지에서의 마지막 미사라고 하여 엄마 연미사를 봉헌했다.

 

“2년 전 터키, 그리스 성지 순례를 마치고 계획 된 성모 발현지 성지 순례가

성모님의 이끄심으로 이렇게 끝을 맺게 되었습니다.” 라고 시작된 조카 신부님의

강론 말씀이었다.

 

미사 후 어제 밤에 덜 둘러 본 성지를 둘러 보았다.

1921년 3월 25일 7남매의 맏딸로 태어난 마리에트 베코가 11살이던

1933년 1월 15일부터 3월 2일까지 여덟 번이나 성모님께서

“가난한 이들의 동정녀”로 발현 하셨단다.

세 번째 발현 날인 1월 19일 성모님께서는 마리에트를 샘터로 인도하시어,

“이 샘은 모든 민족들을 위해서,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하여 마련된 것이란다.“

그 샘에서는 여전히 물이 솟고 있었고,

우리들은 성모님 말씀대로 몇차례나 샘물에 손을 담구었고, 물을 받아 마셨다.

 

 

 

성모 칠고(성모님의 7가지 고통)를 나타낸 조각상도 있었고 15처 십자가의 길도 있었다.

특이하게도 스테인드 글라스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햇살을 받아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색깔을 나타내 너무 예뻤다.

 

 

 

점심을 먹고, 오후 1시 다시 파리로 향했다.

오는 도중 간혹 비가 뿌렸지만 그런대로 오늘 날씨는 괜찮았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들른 휴게소 근처 잔디밭에 네잎 클로버가 얼마나 많던지 ....

많이 찾았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행운을 드립니다.”하고 나누어 주었다.

 

6시간 만에 파리에 도착하여 “우정”이라는 한식당에서 순두부찌개로 맛있게 저녁 식사를 한 후

세느강에 가서 유람선을 탔다.

세느강은 길이가 776Km나 되는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큰 강으로 수심이 73m이고,

32개의 다리를 갖고 있는데, 이 강을 따라 파리의 역사가 이루어졌단다.

1시간 10분 동안 유람선을 타고 가며 다이애나 왕비가 카파라치를 피하다가 사고를 당한

 알마 다리 밑을 지나 자유의 여신상과, 높이 324m나 되는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과,

개선문도 보았고 루브르 박물관을 비롯한 여러 박물관과 왕궁들 빅토르 유고의 작품인

 “노트르담의 꼽추”의 배경인 노트르담 성당 등 여러 건물들이 보였다.

 

해가 너무 늦게 져서 조명 밝힌 에펠탑을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

유람선이 선착장에 다다르자 에펠탑에 하나 둘 불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Evergreen Laurel Hotel에 투숙했다.

 

기적수가 들어 있는 가방을 버스에서 내리던 가이드 김 시보씨의 말

“가방에 돌이 들었읍니까? 왜 이리 무겁나요?”

 

내일 밤은 비행기에서 보내게 되니 오늘 밤이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밤인 셈이었다.

 

4월 24일 (목)

아침 식사후 오전 8시 호텔을 나서서 파리 시내 관광을 했다.

파리는 전철이 대중 교통으로 큰 역할을 하고 있으며,

버스는 연계 노선 역할을 하고 있단다.

자전차 문화가 발달하여, 차로 중앙에 자전거 전용도로가 있고

점선으로 중앙선 표시까지 해 놓았으며, 차 중에서 가장 우선권을 갖는게 유모차라고 했다.

 

 

개선문

높이 50m,폭 45m로 콩코드 광장과 연결되는 샹제리제 거리에 있는 문으로서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기공 되었으나 그의 사후에 준공 되었단다.

 

문 내부에는 승리한 격전지에서 활약한 660명의 장군들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밑 줄 그으진 이름은 전사자라고 했다.

문 아래에는 무명 용사의 무덤이 있는데, 사철 등불이 꺼지는 일이 없고,

헌화가 시드는 일이 없단다.

 

비문에는 “자기 조국을 위해 한 군인이 쉬고 있네.”라고 씌여 있다고 했다.

 

 

노트르담 성당

 

12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182년 만에 건설된 프랑스 제1의 고딕식 성당으로

우리 나라 명동 성당이 이 성당을 본따서 지은 것이란다.

탑 꼭대기에 올라 서면 파리 시가가 한 눈에 바라 볼 수 있다고 했다.

 

정면에 구약에 등장한 28명의 왕들과 12지파와 4대 복음을 상징하는 동물 (마태오;천사, 마르코;사자, 요한;독수리 루까;황소)성 안나 상 등이 조각 되어 있었다.

 

성당 안에는 빨강, 파랑, 노랑, 흰색의 네가지 색깔이 햇빛을 받아 10가지에서 12가지

색깔의 효과를 낸다는 스테인드 글라스가 너무나 아름다왔는데,

주제는 신구약 역사를 담고 있단다.

 

성 루이 16세에 의하여 갖고 온 예수님 가시관이 이 성당에 보관되어 있다고 했다.

 

 

예수 성심 대 성당

 

“순교자의 언덕”이라는 뜻의 몽 마르뜨르 언덕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1910년에 지어졌고, 생드니 주교가 이 곳에서 순교하였기에

몽 마르뜨르 성당이라고도 한단다.

 

이 성인은 짤린 자기 목을 들고서 7Km나 걸어 갔다는 말이 전해 내려 오고 있다고 했다.

1919년 국회에서 일반인을 위해 24시간 성체조배 할 수 있도록 성체 현시를 결의 했단다.

성당 안에 들어가니 마사 중이라서 사진 촬영은 못하고

 잠시 조배만 드리고 둘러보고 나왔다.

 

 

점심은 전채 요리로 프랑스 특식인 달팽이 요리가 나왔다.

꼭 골뱅이 요리 같았다.

 

오후 2시 루브르 박물관으로 갔다.

역시 제한된 시간과 많은 사람들로 수박 겉핥기식 감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세느강 가에 자리 잡은 세계 최대 미술관의 하나로 20만 점 이상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나 3만 5천여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단다.

그 유명한 레오나르드 다빈치 “모나리자”는 원근법을 중시했으며,

이 그림은 설명을 하지 않는게 가장 좋은 설명이라고 했다.

 

비오 7세를 비롯한 150명의 역사적인 인물들을 등장 시킨 “나폴레옹 대관식”이란

 작품도 보았고, 인간의 아름다움을 8등신으로 표현한 미로“븨너스”

모두 동서고금의 일류 걸작품들을 감상했다.

 

박물관 마당으로 나와 보니 우리들은 유리로 만든 피라미트 모형 속에서 나온 셈이 되고, 

나폴레옹 생전에 준공되었다는 또 하나의 다른 개선문이 보였다.

 

 

파리 외방 전교회

유물관에는 김 대건 신부님의 친서가 전시되어 있었고, 베트남중국아시아에서

활동했던 외방 선교회 소속 성직자들의 순교사 등 활동 상황이 자세히 사진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파리 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은 한국 교회의 여명기를 열었고,

지금까지 계속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고 했다.

 

                      4/24 아침 Evergreen Laurel Hotel에서

                                                                파리 외방 선교회

 

 

기적 메달 성당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성녀 루이즈 드 마리약이 함께 “사랑의 딸” 회를 창립하고

이 성당을 세웠단다.

 

마당에 성 빈첸시오 동상이 있었고, 1830년 7월 18일에서 19일에 걸쳐 성모님께서

성 카타리나 라부레 수녀에게 발현한 장면이 조각되어 있었다.

조각의 특색은 성모님 머리에 별이 그려져 있는 것이고, 성모님께서

 “이 메달을 착용하라.”고 말씀하셨단다.

 

이 메달 착용은 많은 기적과 치유가 이루어져, 교구 주교를 통해 교황님의 정식 인가를

 받았다고 했다.

 

카타리나 성녀 시신은 이 성당에 모셔 놓았고, 심장은 생가에 안장 되었단다.

 

저녁 식사는 도시락으로 대신하고 오후 9시에 출발하는 AF262(KE262) 서울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파리 찰스 드골 공항으로 바삐 갔다.

이 비행기가 2년 전 엄마가 돌아 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순례를 중단하고,

혼자서 아테네에서 파리까지 와서 환승하려고 지루하게 6시간이나 기다려서 탔던 바로 그 비행기였다.

 

잠을 영 이루지 못 해서 불편했지만 좌석마다 T.V 모니터가 달려 있어서

채널을 돌려 가며 보느라 덜 지루하게 보내다가 25일(금) 오후 2시 38분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12일 동안 룸 메이트였던 귀주와 헤어지고 우리들은 전세 버스로 대구로 향했다.

원래 계획은 오늘부터 1박 2일 동안 용인 양지 리조트에서 경북여고 39회 동기회가 있어서 인천 공항에서 바로 갈까 했었는데,

토요일(26일) 저녁 미사에 시누이 아들 혼인 미사에 우리 부부가 증인을 서 주기로 되어 있어서 동기회 행사 참여를 포기했다.

 

밤 8시 반쯤 대구 고성성당에 도착하니 남편을 비롯하여 동반자의 가족들이 우리들을 반가이 맞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