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해외)

이집트, 이스라엘, 이태리 성지 순례기(2004년도)

김혜란골롬바 2012. 5. 30. 09:30

 

나에게는 살아오면서 하고 싶은 일이 세 가지 있었다.

첫째는 해외 성지 순례 다녀오는 것이고

 둘째는 텔레비전 퀴즈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이고

셋째는 웨딩 드레스 차려 입고 결혼 사진 다시 찍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 늙기 전에 결혼 25주년 은혼식때 하려고 했는데

그래서 영주한테서 거금을 선물 받았었는데 남편이 죽어도 못한다고 하여 포기했었다.

퀴즈 프로그램 출연은 나이를 먹어가니 기억력도 자꾸 약해지고 자신도 없어져서 출연했다가 전국 망신당할 것 같아서 포기했었다.

해외 성지 순례는 몇 번이나 시도했었는데

한번은 신청할러니 팔레스타인 분쟁으로 이스라엘 입국 금지로 그 일정이 취소되었었고 한번은 사스 유행으로 내키지 않아 포기했었다

그런데 그 일정 입국 날짜가 2003년 5월 22,3일쯤이었는데 아버님께서 5월 17일 돌아 가셨으니 그 때 갔으면 큰 일 날뻔 했었고 사스 때문에 안 간게 천만 다행이었다.

이번에도 두 어머니 때문에 무척 망설였는데 설마 그 사이에 무슨 일 생기겠냐고

 더 늙기 전에 다리 힘있을 때 다녀오라는 남편과 두 딸의 격려에 힘입어

 우리 식구와 몇몇 외에는 아무도 모르게 시도했다.

마음같애선 나 해외 성지 순례 간다고 여기 저기 자랑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고

아무쪼록 중간에 불려 오는 일 없이 무사히 잘 다녀오기만을 빌었다.

 

 

10월 4일 (월)

그토록 바랐던 순례 날이 드디어 오늘로 다가왔다.

가기로 마음먹었던 날로부터 한 달 남짓 잠을 설쳐 왔던 데로 오늘도 새벽 2시 30분부터 깨어서 뒤척이다가 새벽 미사를 다녀왔다.

큰 트렁크는 나의 룸메이트인 홍 마르타가 승용차로 서울 갔다가 간다기에 그 차편에 실어 보내고 남편 출근 길에 따라서 동대구 역으로 갔다.

지난 8월말 갑자기 유방암 진단으로 수술을 받았던 친구 신 혜란(보나)과 서울역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었다.

8시 40분발 생긴 후 처음 타보는 KTX로 서울에 갔다.

신혜란과 서울역 카페에서 만나 차와 케이크를 앞에 놓고 한시간 정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잘 다녀 오마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헤어졌다.

그리고 지하철을 타고 청담역에서 내려 오랜만에 중학 동창 김정숙을 만나 걔가 사 주는 맛있는 점심을 먹고 걔네 집에 가서 시간을 보내다가 홍마르타 집으로 갔다.

요행히 두 친구 집이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에 보너스로 반가운 친구 정숙이를 만나는 은혜가 나에게 내린 것이다,

외국 나가는 일 하나만 해도 얼마나 큰 일인데 새벽 미사를 시작으로 도대체 한나절에 몇 가지 일을 보느냐고 마르타가 탄복했다,

정숙이가 공항 터미널까지 우리를 승용차로 태워 주어서 너무나 고마웠다.

오후 5시 30분 생긴 후 처음 와 보는 인천 국제 공항 3층 G라운지에서 12박 13일 동안 이 순례 길에 나설 일행들을 만났다.

 

이 강재(요셉) 지도 신부님과 인솔자 이 주연(미카엘라)씨를 포함하여 16명이라는 적은 숫자에 약간 실망했으나, 어쩌면 가족적인 오붓한 분위기가 될 것 같아 괜찮은 듯 싶었다.

본래 15명 이상이라야 출발하는데 적자를 감수하고 이번 코스를 예정대로 진행해 준 가톨릭 신문사 측의 배려에 감사했다.

가톨릭 신문사 본사가 위치한 대구에서 온 사람이 나와 마르타 둘 뿐이라는 것이 의외였다.

처음에는 몰라 뵈었는데 이 강재(요셉) 신부님은 2002년도에 지산 성당에서 보좌 신부님으로 계시던 분이었다.

 지금은 수원 교구 공군 화성대 군종 신부님으로 병역의 의무를 하고 계신단다.

범물 본당에서 왔다고 했더니 “정말 제가 기억이 안 납니까? 혹시 그 때 냉담 중이었던 게.....?” 하시며 서운해 하셨다.

아마 그 당시엔 지산 성당에 보좌 신부님이 두 분이나 계셨고,

또 2002년 하반기에 범물 성당이 생겨 분당되었고,

또 사람 얼굴 기억 잘 못하는 내 눈썰미 탓인가 보다.

충남 예산에서 한국 순교 복자회 소속 전 인숙(마리아) 수녀님께서 부모님과 고모님을 모시고

오셨고, 서울 흑석동 본당에서 네 자매님, 의정부 용현 본당에서 두 자매님,

전주 우아동 본당에서 오신 한 쌍의 부부,

그리고 대구에서 온 홍 마르타와 내가 우리 일행의 전부였다.

흑석동 한 계수(데레사)씨와 의정부 한 동수 (마르타)씨는 친자매 사이였다.

출국 수속 후 면세점에서 시간 보내다가 식구들에게 인사 전화 후 휴대폰 전원을 끄고

 저녁 8시 30분 대한 항공편으로 드디어 장도에 올랐다.

기내식을 먹고 자다 말다를 반복하며 정말 지루하게 12시간만에 카이로 공항에 도착했다.

우리나라와 시차가 7시간이라 도착하니 현지 시간이 새벽 1시 30분이었다.

 입국 수속 후 가이드 이 정희(카타리나)씨를 만나 전세 버스로 공항에서 10여분 거리에 있는

콩코드 호텔에 여정을 풀었다.

 

   

10월 5일 (화)

새벽 4시가 지나서야 잠깐 눈을 부쳤다가 아침 식사 후 버스 안에서

아침 기도와 순례자의 기도를 바친 후 카이로 순례 길에 나섰다.

 

순례자의 기도 

태초에 빛을 있게 하시고 당신 말씀을 보내시어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순례의 길을 떠나면서 당신께 의탁하오니

당신 아들 예수의 발자취를 따르는

우리를 인도하소서. 

성서 안에서, 전례 안에서, 가르침 안에서 만났던 예수님을

이제 성지에서 새롭게 뵙고자 하오니

우리로 하여금 신앙과 사랑을 다하여

당신의 구원 의지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느끼게 하여 주소서.

좋으신 아버지,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어

이 순례 동안에 항상 주님의 현존 안에 머물게 하시고

서로 사랑하게 하시며, 앞으로의 모든 날이

이 순례의 은혜로 인도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말씀의 진리 안에 사는 삶 되게 하소서.

또한 우리가 순례의 길을 가는 동안

우리 가족들에게 영육으로 건강하도록 은혜 주시옵고

우리의 길을 안내할 모든 이들도 축복하여 주소서.

아멘.

 

카타리나씨는 귀에 쏙쏙 들어오도록 설명을 얼마나 자신 있게 잘 하든지

 그 박식함에 모두 입을 모아 감탄했다.

그 장소에 적절한 성서 구절 인용과 어울리는 성가를 부르게 하면서

 피정 프로그램처럼 잘 진행했다.

우리 사이에는 화장실을 “작은집”이라 부르기로 했다.

 이곳에서는 작은집 한번 다녀오는데 사용료가 1달러에 6명,

그래서 작은집 갈려면 6명씩 계(?)를 모아야 했다.

그런데 형제분들은 신부님까지 3명뿐이어서 남 여 따로 요금을 받는 곳에서는

부득불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이집트는 아프리카 대륙의 북동쪽에 위치하며 사하라 사막 안에 놓여 있다.

북쪽으로는 지중해, 남쪽으로는 리비아, 동쪽으로는 이스라엘과 아카바만과 홍해를 접하고

있다. 이런 지리적 위치로 인해 이집트는 고대부터 세계 무역의 핵심이 되었다.

이집트는 100만 평방km를 차지하며, 스페인의 두 배, 우리 한반도의 4.5배의 크기인데

국토의 90%가 사막이다.

나일강은 서쪽 사막의 모래 언덕과 산악 지역인 동쪽 사막을 가로지른다.

 인구는 6,500만 명에서 7,000만 명 정도이고, 주요 민족은 이집트인, 베드인, 베르베르인등

 햄족이 99%이며, 언어는 아랍어가 공용어이고, 종교는 이슬람교가 93.7%, 기독교가 6.3%이나 기독교인 대다수가 동방 정교회인 곱틱파이다.

아프리카에서 제일 처음 지하철을 건설한 나라란다.

 

 

성가정 아기 예수 피난 성당

이집트로 피신하시다(마태 2:13-15)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 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요셉 성인이 천사의 말을 듣고 헤로데의 아기들 학살을 피해 성가정이 이집트에 2년 간 피난해 사는 동안 두 달간 머물렀다고 전해지는 곳이라고도 하고,

이집트로 올 때와 이스라엘로 갈 때 잠시 머물었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파라오의 딸이 모세를 강에서 건져냈다고 전해지는 갈대 늪 옆에 세운 고대 양식의 교회이다.

이집트 비잔틴 바실리카 양식으로 넓은 회중석과 2개의 통로를 가지고 있는 이 성당의

12개의 대리석 기둥은 고대 건축물에서 가져와 사용했으며, 기둥 중의 하나는 화강암으로 잘

 다듬어지지 않은 돌로 되어 있는데, 이는 가롯 유다를 지칭한다고 한다.

예수님의 성가정이 고향을 등지고 이집트로 피신하고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기까지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이끄심에 따른 것이었다.

피난 성당은 새삼 성가정의 모든 결정권이 천사를 통해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께 달려

있었음을 돌아보게 한다.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책을 찾기 보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하느님의 이끄심에 전적으로 의탁한 요셉, 주님의 말씀을 가정의 중심에 놓고,

하느님의 뜻을 찾아 실천하며, 가정을 이끌어 가려는 요셉 성인을 비롯한 성가정의

굳건한 믿음과 순명의 자세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필요한 은총을 생각하며

두 손을 모으게 한다.

 

 

모세 기념 성당

기원전 350년경 당시 예언자 예레미아 시나고그에 의해 최초로 회당으로 건설,

기원전 30년경에 로마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아랍에 의해 로마 통치자로부터 탈환되어

곱틱 교회에서 새로 지은 성당이다.

1890년 발견되어 회당에 있는 Geniza Document에는 11-12세기 당시의 유대인들의 생활상이 기록되어 있으며, 기원전 학자 에스라가 발견한 모세의 토라(기원전 475-6세기경)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 회당은 회당 안의 12세기 때의 대리석 건조물이 모세의 기도 장소를 상징하듯 모세가 살았던 장소, 출애급때 이집트 델타 동남부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의 출발 장소로 알려져 있다.

예레미야가 느부갓네살 왕(기원전 606-538년)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 이 곳에 와서

설교를 하였으며, 그의 무덤이 있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피라미드

시내를 벗어나자마자 끝도 없는 황야를 달려서 피라미드에 도착했다.

 세계 최대의 건축물로 Khufu왕의 것을 비롯한 기자 지역의 3대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 고대

 왕국의 전성기 제4왕조(기원전 2613-2494년)의 Khufu왕, Khafre왕, Memdaure왕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존하는 70여 개 피라미드 중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학자들은 이 피라미드가 단순한 왕의 무덤이 아니라 사후 세계의 신앙과 관련된 신성한

건축물로, 해와 달을 이용한 천체를 관측하는 천문대로 활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3대 피라미드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 된 Khufu왕의 피라미드는 높이 146.7m, 둘레 230m,

사변 길이 186m, 부피 259만 4,914평방m로 경사각 51도 50분을 유지하며 정확하게 쌓아 올린 세계 최대의 불가사의한 걸작품이라 한다

이 피라미드를 구성하는 석재는 석회암으로 평균 무게는 2.5톤이며 230만개(일부 학설 286개)를 쌓아 올렸으며 내부는 왕의 방, 왕비의 방, 대회랑, 통로, 환기통 등 복잡한 구조로 축조됐다.

 이 피라미드의 각 능선은 거의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으며, 각도의 오차는 진북에서 5분 정도 밖에 벗어나지 않아 우연한 배열의 결과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정교한 건축물이란다.

그리스의 역사학자 Herodotus는 약 10만 명의 인원이 약 10년 간에 걸쳐 건축하였다고

추산했으나 현대 일부 건축 학자들은 피라미드 건축의 정밀도 등을 감안 4-5천명의 숙련되고

조직된 기능인들이 건축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으나, 건축 방식에 있어서는 의문점이

해명되지 않고 있단다.

피라미드 안은 “들어가도 후회, 안 들어가도 후회한다”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도굴꾼이 뚫어 놓은 입구를 통해 길게 줄을 서서 순서대로 들어갔다.

 땡볕에 사막 위에서 순서를 기다리기에도 더워 죽을 지경이었는데 허리를 반 이상이나 굽혀서 들어가야 될 정도로 좁고 낮은 비스듬한 지하 계단으로 걸어 내려가자니

 너무 더워서 땀은 비 오듯 흐르고 다리는 후들거릴 지경으로 무척 아팠다.

 사진 촬영하기 좋도록 (세 피라미드가 한 렌즈에 잡히도록) 마련된 장소로 옮겨가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스핑크스

인면수신으로 유명한 스핑크스는 그리스말로 “나는 모르겠다.”는 뜻이고,

아라비아 말로는 “공포의 아버지”라고 한다.

 그러나 터키 시대에 사격의 표적이 되어 코가 깎이고 수염은 영국군에 의해 뽑혀 나가

없어진 이후 얼굴이 공포보다는 오히려 경애심이 생길 정도이다.

Khafre왕 피라미드 동쪽에 있는 스핑크스는 머리 부분은 파라오, 몸은 사자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거대한 자연석(석회암)으로 길이 57m, 높이 21m로 무덤의 수호신이며

동시에 제단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스핑크스의 건축 연대는 18왕조 Tuthomosis 4세(기원전 1425-1417년 재위)가 꿈에 계시를

 받아 당시 모래 속에 파묻혀 있던 스핑크스를 발굴하고 스핑크스 앞에 기념비를 세웠다고 한다.

Tuthomosis 4세는 원래 차남이었으나 출애급기의 모세의 재앙(장자 사멸) 때문에

왕이 되었다 한다.

 

 

 

이집트 국립 박물관

이집트 전 지역에서 출토된 13만여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박물관으로서 선사시대의 유물, 미술품, 걸작품, 상형 문자, 각종 형태의 크고 작은 미이라가 전시되어 있었다.

1층 51개 전시실에는 고왕조, 중왕조, 신왕조의 유물과 그리스 로마 시대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2층 전시실에는 투탄카문 왕의 무덤에서 발굴된 유물과, 이집트 신왕조 시대 왕들의

 미이라 및 기타 유물들이 보존, 전시되어 있었다.

2시간에 걸쳐 일, 이층을 오르내리면서 사진 촬영해 가면서 다니자니 날씨는 덥지,

다리는 아프지 지칠 지경인데, 가이드 카타리나씨는 한마디도 거침없이 설명을 얼마나

잘 하든지 정말 대단했다.

그리고 칠순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따라 다니시면서 관람하시는

수녀님 가족(아버님 연세가 76세)들의 모습도 놀라왔다.

 

컵라면과 누룽지를 준비해 오라고 했지만 아무거나 잘 먹는 나인지라

이 곳 식사는 그럭저럭 견딜 만 했었다.

저녁 식사 후 호텔에 돌아와 호텔 회의실을 빌려서 순례지에서의 첫 미사를 드렸다.

밤에는 수영장이 있는 호텔 정원에서 결혼식이 있는지 밤 2시가 되도록 노래 부르고 춤추며

 떠들어대는데 나와 구경하자니 너무 피곤하고, 그 소리에 잠은 자꾸 깨고, 투숙객들의 사정을 생각 않는 그들의 배짱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10월 6일(수)

호텔 조식후 카이로를 출발하여 40여 년 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출애급한 그 길을 우리는 몇 시간 동안 버스로 달렸다,

로마 신학원에 재직 중인 김 성길(마르티노) 신부님과 로마에서 유학 중인 현 문권(토마스 아퀴나스)신부님, 그리고 카이로 가톨릭 공동체 회장님 형제분이 우리와 합류했다.

1시간쯤 사막 길을 달리다 보니 교통 체증이 심하더니 앞에서 교통 사고가 나 있었다.

붉은 벽돌을 실은 트럭과 미니 버스가 충돌했는데 버스가 전복되어 있었고,

사망자와 피투성이인 부상자가 길에 눕혀져 있어서 눈 뜨고 못 볼 지경이었다.

아까 신부님 일행을 기다리느라 30여분 지체해서 약간 짜증이 났었는데, 그렇지 않았으면

우리 버스가 당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수에즈 운하는 1869년 11월 프랑스 사람 페르디난드 레셉스에 의해 완성되었는데 길이는

173km이며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해상 운송의 요충지이다.

영국에 의해 관리되다가 낫세르 대통령에 의해 국유화 됐다.

우리는 먼저 해저 터널로 버스를 달려 가다가 다시 홍해를 끼고 시나이 반도에 이르렀다.

시나이 반도는 역삼각형 모양으로 아시아 대륙에 속한다.

 그러니 이집트는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동시에 속한 국가인 셈이다.

1973년 중동 3차 전쟁 이후 이스라엘로부터 반환 받았단다.

비옥한 땅의 상징인 이집트 고센 땅을 버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나와 온통 누런빛으로 뒤덮인 광야를 앞에 둔 모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탈출기 15장 22절-27절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거느리고 홍해 바다에서 수르 광야로 진을 옮겼다.

그들은 사흘 동안 가면서도 물을 만나지 못하다가 마라에 다다랐으나 그 곳 물은 써서 마실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고장을 마라라고 불렀다. 백성들은 모세에게 무엇을 마시라는 말이냐고 하면서 투덜거렸다. 모세가 야훼께 부르짖자, 야훼께서 나무 한 그루를 보여 주셨다. 그 나무를 물에 던지니 단 물이 되었다. 야훼께서는 바로 여기에서 지켜야 할 규칙을 주시고 그들을 시험해 보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너 이스라엘이 너희 하느님 야훼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그가 보기에 바르게 살며 그 명령을 귀에 담아 모든 규칙을 지키면, 이집트인들에게 내렸던 어떤 병도 너희에게는 내리지 아니 하리라. 나는 야훼, 너희를 치료하는 의사이다.” 그들은 샘이 열 두 개 있고 종려나무가 일흔 그루 서 있는 엘림에 이르러 거기 물가에 진을 쳤다.

 

 

 

마라의 샘은 이집트어로 “아윤 무사”로 “모세의 우물”이란 뜻이다. 출애급 후 3일 만에

처음 만났던 우물로서 모세가 쓴 물을 단물로 만들었다는 그 우물로 추측되고 있단다.

그 주위에는 종려나무(대추 야자나무)가 둘러 서 있었다.

 구약성서에서 몇 차례나 언급되는 이 나무는 식사때 후식으로 꼭 나왔는데 성서에서는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나무라 하여 의인에 비유된단다.

잎은 말려서 지붕으로 잇고,(우리나라 초가 지붕처럼) 묶어서 빗자루로 쓰기도 하며 나무 둥치는 의자로 사용된단다.

열매는 우리나라 대추 모양과 비슷하나 크기는 대추보다 더 크고 당도가 매우 높아 곶감 먹는 기분이었다.

 

 

탈출기 17장 1절-7절

이스라엘 백성 온 회중은 씬 광야를 떠나 야훼의 지시대로 진지를 옮겨가면서 전진하였다.

르비딤에 이르러 먹을 물이 없는 것을 보고, 백성들은 모세에게 먹을 물을 내라고 들이대었다.

모세가 “어찌하여 나에게 대드느냐? 어찌하여 야훼를 시험하느냐?” 하고 말했지만,

 백성들은 당장 목이 말라 견딜 수 없었으므로 모세에게 불평을 터뜨렸다.

 “어쩌자고 우리를 에집트에서 데려 내 왔느냐? 자식들과 가축들과 함께 말라죽게 할 작정이냐?” 모세가 야훼께 부르짖었다. “이 백성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당장 저를 돌로 쳐죽일 것만 같습니다.”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이 백성보다 앞서 오너라. 나일강을 치던 너의 지팡이를 손에 들고 오너라. 내가 호렙의 바위 옆에서

 네 앞에 나타나리라. 네가 그 바위를 치면, 물이 터져 나와 이 백성이 마시게 되리라.”

모세는 이스라엘 장로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대로 하였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대들었다고 해서 이 고장 이름을 므리바라고도 하고 “야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가 안 계신가?”

하며 야훼를 시험했다고 해서 마싸아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홍해의 유전 지대를 끼고 사막을 달리면 씬 광야를 지나 르비딤에 이르고 바위에서 물을 솟게 한 모세의 바위가 있었다고 하는 곳을 지났다.

홍해 옆에 유황 온천이 솟는 곳이 있어서 그 곳에 서 내렸다.

 바다에서 흘러 들어 온 고기가 허옇게 익어서 둥둥 떠 있었다.

 모래 속으로 발을 파묻으니 무척 뜨거웠다.

무좀에 특효라 하여 온천물과 바닷물을 번갈아 가며 다녔다.

“아프리카 아카시아”라는 나무가 사막 한 복판에 군데군데 한 그루씩 서 있었다.

 끝없이 넓기 만한 사막에서 자라는 나무들은 크기가 무섭게 모든 동물들의 먹이가 되어서 채 살아 남지도 못하는데, 이 나무는 가시가 얼마나 많은지 짐승들이 근접하지 못하게 함으로서 잘 자라서 후세에 예수님의 가시관에 사용되었다 하니 여기서 하느님의 오묘한 역사 하심을 깨달을 수 있었다.

카이로 공동체 회장님은 이쑤시개 나무라고 했다.

오후 4시 동방 정교회 수녀원 마당에서 미사를 드렸다.

 다른 순례 객들은 신부님을 못 모시고 와서 외국어로 드리는 미사에 구경하듯이

참례했다는데 우리들은 복이 많아서 신부님을 세분이나 모시고 미사를 드렸다.

이 곳 수녀님들은 매일 시나이산 밑에 있는 카타리나 수도원까지 가서 미사를 드린단다.

경당에 들어 가 보니 두 수녀님이 성무일도를 드리는지 크게 소리내어 기도 중이었다.

 

 

그 근처 모세가 기도 드린 산이라 하여 올라갔다.

풀 한 포기 없이 모래 뿐이라 바람은 불지, 미끄럽기는 하지, 그래서 오르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런데 원주민 애들은 부리나케 달려 와서 사탕 얻어먹을 욕심에 맨발로 나는 듯이

산을 오르는 것이다.

줄을 세워서 나눠주면 먼저 받은 아이는 옷 속에 감추고 다시 줄을 서는 것이었다.

걔들 줄 사탕 봉지를 가이드가 아예 준비하고 다녔다.

 

 

내일 새벽에 올라 갈 시나이산이 이 산보다 몇 십배나 힘들다 하여 걱정이 태산이었다.

호텔로 가는 버스 안에서는 가이드로부터 시나이산 등정에 대하여 주의할 점을

설명 들었다.

절대로 무리하지 말 것이며 자신 없으면 다음 일정을 생각하여 일찌감치 포기하란다.

 낙타를 타고 갈 때의 주의 점을 들어 보니 낙타를 타고 갈 것인가 처음부터 걸어 갈 것인가 고심하다가 어차피 힘들텐데 낙타 타고 한 시간 이상을 조마조마하게 어떻게 견디어

낼지 그것도 걱정스러워 걸어서 올라가기로 마음먹었다.

 더군다나 홍 마르타는 죽어도 낙타는 못 타겠다니 .....

시나이산 밑에 있는 호텔에 들었는데 식사랑 시설이 무척 안 좋았다.

모닝콜이 밤 12시 30분이라서 시나이산에 갈 준비를 대강 다 해 놓고 억지로 눈을 붙였다.

 

 

10월 7일(목)

새벽 1시 30분 뜨거운 차 한 잔씩을 마시고 시나이산으로 향했다.

 춥고 바람이 심하다고 하여 옷을 단단히 입었다.

한 마르타씨가 내려다보면서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흑석동 팀과 의정부 팀 6명은 포기하고 수녀님 부모님과 고모님께서는 연세가

많으신 데도 불구하고 씩씩하게 출발 하셨다.

 가이드와 이 강재 신부님, 미카엘라씨, 홍 마르타와 나는 걸어서 올라갔고,

 다른 사람들은 낙타를 타고 올라갔다.

 걸어올라 가기가 너무 힘이 들어 낙타를 탈 걸하고 후회하기도 했다.

 생각 보다 바람도 덜 불고 추위도 덜 했고 위험도 덜 했다.

만약을 생각하여 조심하고 긴장하라고 가이드가 주의를 주었나 보다.

올라오면서 뒤를 돌아보니 캄캄한 가운데 이어지는 손전등 행렬 모습이 무척 보기 좋았다. 마지막 750개의 계단이 시작되는 곳에서는 낙타 탄 사람들도 다 내려서 2명씩 조를 짜서 걸었다.

 몇 차례나 쉬어 가면서 3시간 남짓만에 정상에 도착했다.

새벽 4시 30분 산정 바로 아래에 위치 한 산장 휴게소 한 구석을 빌어서 다른 외국 여행객들이 섞여 있는 가운데 첫 새벽을 맞으며 감격에 찬 미사를 드렸다.

오늘이 결혼 32주년 기념일이라 가족 미사를 봉헌했다.

너무나도 감격적이었다.

남편도 이 자리에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생각했다.

축하 박수도 듬뿍 받았다.

미사 마치고 먹는 컵라면 맛은 정말 일품이었다.

(컵라면에 부어 주는 끓는 물 값이 1달러였다.)

“축하 케이크 대신 컵라면으로” 라며 웃었다.

5시 30분 시나이산 정상에서 보는 일출은 정말 장관이었다.

처음에는 구름이 깔려 있어서 오늘 일출은 못 보나 하고 실망스레 내려오는데,

 어느 순간인지 진홍빛 둥근 해가 구름 사이에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침 삼종 기도를 바쳤다.

 

 

양을 치던 모세가 출애급의 사명을 받고 십계명을 받아 “야훼의 산”으로도 불리는 시나이산.

울퉁불퉁 골이 진 화강암으로 뒤엉킨 산줄기가 아침 햇살을 시간에 따라 그 빛깔을  바꾸자 산정에 서 있던

사람들은 야훼의 음성을 듣던 모세를 떠올리는 양 사뭇 진지한 모습이었다.

내려오는 길은 올라 갈 때보다는 덜 했으나 그래도 힘들고 지루했다.

 워낙 한국 사람들이 많이 오다 보니 낙타꾼들이 우리나라 사람만 보면 “낙타 타!”하고  외쳐 댔다.

내려 올 때 타는 낙타는 더 위험하고 힘든다 하여 모두 걸어서 내려 왔다.

호텔에 와서 아침을 먹고 다시 시나이산 중턱 해발 1500m 지점에 위치한

"성카타리나 수도원"으로 갔다.

 1000년경 시나이 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인 해발 2,642m의 산봉우리를 “카타리나의 산”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이 곳에서 카타리나 성녀의 유해가 발견되면서 부터였고, 수도자들이

성녀의 유해를 성당의 제대 옆으로 모신 뒤부터 성 카타리나 수도원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탈출기 3장 2절-4절

모세가 양떼를 이끌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더니 야훼의 천사가 떨기 가운데서 이는 불꽃으로 그에게 나타났다. 떨기에서 불꽃이 이는데도 떨기가 타지 않는 것을 본 모세가 “저 떨기가 어째서 타지 않을까? 이 놀라운 광경을 가서 보아야겠다.” 하며 그것을 보러

오는 것을 야훼께서 보시고 떨기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하느님께서 부르셨다.

 

그 수도원 마당에 그 “불타는 떨기나무”가 있었다.

다른 곳에 나눠 심어도 안 자라고 그 곳에 꼭 한 그루만 남았단다.

덩굴식물 같이 축축 늘어져 있었다. 모세가 처음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불타는 떨기나무가 수천년 시간을 뛰어 넘어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불타고 있었다.

 

 

탈출기 2장 15절-21절

모세는 파라오의 손을 피하여 미디안 땅으로 달아나 그 곳 우물가에 앉아 있었다.

미디안에는 딸 일곱을 둔 사제가 있었다. 그 딸들이 그리로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붓고

 아버지의 양떼에게 물을 먹이려고 하는데 목동들이 나타나서 그들을 쫓았다.

그러자 모세가 일어나 그 딸들을 도와 목동들을 물리치고 양 떼에게 물을 먹여 주었다.

아버지 르우엘은 딸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물었다.

 “오늘은 웬일로 이렇게 일찍 돌아오느냐?” 딸들이 대답하였다.

“어떤 이집트 사람이 목동들의 행패를 물리쳐 우리를 건져 주고 양들에게

물을 길어 먹여 주었습니다.” 아버지가 딸들에게 일렀다.

 “그 사람이 어디 있느냐? 그런 사람을 내버려두고 오다니 될 말이냐? 어서 모셔다가 음식을 대접해 드려라.” 그는 모세가 자기의 청을 받아 들여 같이 살기로 하자 딸 시뽀라를 주어

 모세를 사위로 삼았다

.

모세가 앉아 있던 그 우물에는 바싹 말라 물은 한 방울도 없었는데 이 곳에 손을 담그면

결혼을 곧 하게 된다는 전설이 내려온다기에 “시집 안 간 우리 큰딸을 데려 와야겠다.”

말하며 웃었다.

 이 우물을 인연으로 모세가 이드로 가문의 시뽀라와 결혼하여 아기를 낳았다 해서

 “이드로의 우물”이라고도 한단다.

수도원 내부를 구경하고 옆 마당에 있는 납골당에 갔다.

머리는 머리대로 뼈는 뼈끼리 장기는 장기대로 따로따로 보관되어 쌓여 있었다.

시나이산 정상에서 기도하다 세상을 떠난 어느 수사님의 미이라도 있었다.

 

오전 10시 30분 시나이산을 출발하여 타바 국경 근처 “한강 식당”에서 카이로 공동체

회장님이 쏘시는 맥주를 곁들여 오랜만에 한국 음식을 모두들 무척 맛있게 먹었다.

가이드 이 정희(카타리나)씨와 로마서 오신 두 신부님, 카이로 공동체 회장님 형제분들과

아쉬운 작별을 나누었다.

타바 국경에서 이스라엘 입국 수속이 너무나 까다로웠다

. “이 짐은 당신이 쌌습니까?”, “이 짐은 주욱 당신과 함께 있었습니까?”, “누가 맡기거나 전해 달라고 부탁한 물건은 없습니까?”, “당신네들은 오래 전부터 서로 알던 사이 입니까?” 등의

질문들을 회장님과 미카엘라씨를 따로따로 불러서 물었다.

 사실 그동안 바쁜 순례 일정으로 그때까지 아직 서로의 이름도 외우지 못했던 터라

새삼스레 서로의 이름 외우느라 부산했었다.

 여러 고비를 넘기고 겨우 입국 허가가 떨어지려는데 갑자기 사람들을 밀쳐 내더니

고함을 지르며 문을 닫으며 야단이다.

 일종의 입국 폐쇄였다.

 무슨 영문인가 했더니 폭발 테러 정보가 입수되었단다.

 장막절 휴가를 마친 때인지라 많은 사람들이 들끓고 있었고,(그 사람들은 웬 짐이 그리도 많던지) 애들은 울어대지, 날씨는 찌는 듯이 덥지, 정말 야단법석이었다.

수녀님께서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셔서 “아버님, 어머님, 고모님” 하시며 모셔 온 어른들

챙기시느라 정신 없으셨다.

한참 뒤 다시 수속을 밟아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전세 버스를 탈 수 있었다.

 과연 출애급이 지금 이 시대에도 어렵구나 하고 공감했다.

새 가이드의 이름은 김 형(엘리사벳)씨였다.

 연상의 사람들도 “형”이라고 불러야 하니 이상하고 우스운 이름이었다.

엘리사벳씨는 화장실을 “제2성지”라고 부르자고 했다.

이스라엘에서는 제2성지 가는데 1달러에 4사람을 모아야 했다.

 물도 얼마나 귀한지 (석유보다 물이 더 비싼 나라라니) 식당에서 밥을 사 먹어도 물 값은

꼭 따로 계산해야 했다.

이집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 작은 생수병(0.9리터도 안 되는) 1병에 1달러였다.

저녁 8시쯤 아라드 인바 호텔에 투숙했다.

 아무 것이나 잘 먹는 나도 입국 수속 때문에 시달린 탓인지, 음식에서 나는 강한 향신료 냄새

탓인지 통 먹을 수 없었다.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10월 8일(금)

아침 식사 전 한국에 전화부터 했다.

어제 결혼 기념일이라 전화하려고 했는데 시나이는 국제 전화가 불통이란다.

남편과 전화가 연결되지 않아 영은이에게 먼저 했더니 어제 신문에 카이로에서 폭발 사고가

 났다는 기사가 나서 걱정했었단다.

그래서 어제 입국 수속을 그렇게 까다롭게 했었나 보다.

 폭발 사고가 난 호텔은 몇 차례나 우리 일행이 그 앞을 지나 온 곳이었다.

남편과 통화하면서 이번 성지 순례가 너무나 좋다고, 오게 해 줘서 너무나 감사하다고 말했다.

 

아침 식사 후 아라드를 출발하여 사해와 소금 산을 양옆으로 두고 버스를 달렸다.

사해(Dead Sea)라는 말은 예로니모 성인이 가장 처음 사용했단다.

사해는 최고 수심이 390m로 세계에서 가장 낮은 지형이다.

염도가 짙어 생물이 살지 못한다고 하여 사해라 부른단다.

 수영복을 준비 해 오지 않았기에 반바지를 사 입고 물 속에 들어 갔다.

눈과 입 속에 바닷물이 들어가면 치명적이라고 가이드가 주의를 주었다.

병원에 실려 가 위 세척을 받아야 될 정도란다.

수영 못 하는 사람도 물에서 둥둥 떴다.

나는 머리 손질하기 번거러워 다리만 담갔다.

사해 머드팩이 피로 회복과 피부 미용에 좋다 하여 팔과 다리에 시커멓게 바르고

기념 사진도 찍었다.

 

 

 쇼핑 센터에서 사해 소금으로 만든 미용 제품을 팔고 있기에 난 발뒤꿈치에 바르는

크림을 하나 샀다. 효과가 어떨지?

소금 산을 끼고 버스를 달리다가 소돔이라고 추정되는 곳에서 내렸다.

창세기 19장 1절~29절에 나오는 내용처럼 뒤를 돌아보지 말고 있는 힘을 다해 산으로  피하라는

천사의 말을 어긴 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으로 변해 버린

그 형상이 남아 있었다.

사무엘 상 24장 1절에서 23절에 나오는 뒤를 보고 있는 사울다윗이 살려 주었다는

 엔게디에서 버스를 내려 성서를 읽고 묵상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성서에 나오는 것처럼 주위에 아직도 양들이 노닐고 있었고,

사울이 뒤를 보았다는 작은 동굴도 있었는데, 이곳을 다윗의 동산이라고 한단다.

 

1947년 이사야 예언서 두루마리가 양치는 목동에 의해 발견되어 유명해진

 "꿈란 공동체"둘러보았다.

 

이 곳은 에세네파가 기원전 200년에서 기원 후 70년까지 공동 생활하던 수도원 자리란다.

이 수도원 자리에는 물의 증발을 막고 모아 두기 위해 사방을 막은 물 저장소가 있었다.

 

 

최후의 만찬 성당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다(마르꼬 복음 14장12절-25절, 마태 26:17-19, 루까 22:7-23)

   무교절 첫날 곧 파스카 양을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가서 차리면 졸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 두 사람을 보내며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가거라. 그러면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를 만날 터이니 그를 따라 가거라. 그리고 그가 들어가는 집의 주인에게, '스승님께서 '내가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음식을 먹을 내 방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하여라. 그러면 그 사람이 이미 자리를 깔아 준비된 큰 이층 방을 보여 줄 것이다. 거기에다 차려라." 제자들이 떠나 도성 안으로 가서

보니, 예수님께서 일러 주신 그대로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드신 곳이며. 부활 후 두 번이나(요한 20:19-23, 요한 20:26)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곳이다.

성령 강림 때(사도 행전 2:1-13)의 견진 성사가 이루어진 그 다락방 창문도 보였는데,

지금은 순례객에게 창문만 보여 주고, 프란치스꼬 수도원 식구들에게 공동 기도만 할 수 있게

 허락되었단다.

이곳에서 성체, 신품, 견진, 고해의 4가지 성사가 이루어진 곳이었다.

 

성모 영면 성당

성모님께서는 원죄 없이 잉태되시고 하늘의 불러 올림을 받아 살아 계신 육신 그대로

승천하셨지만,(성모 몽소 승천) 성모님의 돌아가신 모습을 조각하여 보관하며 기념하는

곳이었다.

그 조각상 천장에는 성서에 나오는 하와를 비롯한 여러 여인들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지금은 독일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예수 승천 성당

예수님의 승천(사도행전 1장 6절-11절)

   사도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 물었다. "주님, 지금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 나라를 일으키실 때입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한으로 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신 다음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예수님께서 올라가시는 동안그들이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는데,

갑자기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갈리레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을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올리브 산으로 데려와서 그들을 축복하신 후 하늘에 올라가신

곳으로 가장 정확한 승천 장소로 여겨지고 있다.

 아직도 예수 승천시 남겨진 전설적인 예수님 발자국이 난 돌을 보관하고 있었고,

처음에는 예수님 승천하신 곳을 나타내고자 지붕이 없었으나 이 지역에 살고 있는 모슬렘 사람들이 아치형의 벽을 쌓고 현재의 둥근 천장을 더 만들었다고 했다.

 지금은 회교도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지만, 예수 승천 날은 우리도 미사를 드릴 수 있단다.

 

 

주의 기도 성당

주님의 기도(루까 복음 11장 1절-4절, 마태 6:7-15)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눈 곳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이 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의 기도를 가르치셨고, 예루살렘의 몰락을 예언 하셨으며(루까 21:5-7, 마태 24:1-4) 주님의 마지막 오심과 제3의 종말(마르 12:1-4)을 예고 하셨다.

교회 안의 회당 벽에는 주의 기도가 62개국어로 쓰여져 있었는데 우리 한글로 된 주의 기도도 부산 교구에서 보내어져 붙여 있었다.

1875년 프랑스는 갈멜 수도원을 세워 이 곳을 관리하게 하였다.

 

 

예수님 눈물 성당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며 우시다(루까 복음 19장 41절-44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그 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내려보시고 한탄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을 기념하여

지은 성당이었다.

 나도 예루살렘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그 때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며

기념 사진을 찍었다.

 

겟세마니 동산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시다(루까 복음 22장 39절-46절, 마태 26:36-46, 마르 14:32-42)

 예수님께서 밖으로 나가시어 늘 하시던 대로  올리브 산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 갔다. 그곳에 이르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곳에 혼자 가시어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그때에 하늘에서 천사들이 나타나 그분의 기운을 북돋아 드렸다. 예수님께서 고난에 싸여 더욱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시어 제자들에게 와서 보시니,

그들은 슬픔에 지쳐 잠들어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자고 있느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일어나 기도하여라."  

 

성지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인 겟세마니 동산은 올리브산 기슭에 놓여 있고,

 오늘날에도 2,000년 전 그대로를 보여 주고 있단다.

예수께서 가끔 은둔과 기도를 위해 이곳에 오시어 기도하셨고, 수난 당하기 전날 밤

가장 슬픈 수난의 시간을 체험하셨으며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신 곳이며

유다가 대제관의 하인들을 데리고 와 예수를 잡아 넘긴 곳이었다.

오후 4시 헤레나 성녀가 이 곳에 세운 성당에서 미사를 드렸다.

 내가 독서를 했고 친구 신 혜란(보나)을 위하여 생미사를 봉헌했다.

미사 후 모두 그 바위 앞에 꿇어앉아 바위에 손을 대고 성가 117번 “지극한 근심에”를

부르면서 모두 훌쩍거렸다.

밖에 나오니 “많이 우셨읍니까?”하고 물어 보시는 신부님의 두 눈도 붉게 물들여 있었다. 겟세마니 성당 정원에는 예수님의 수난을 목격했을 법한 그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아주 오래 된 올리브 나무 여덟 그루가 남아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예루살렘 성 밖 시온산에서 기드론 골짜기에 이르는 길을

버스를 타기도 하고 또 걷기도 하면서 둘러보았다.

오늘 저녁부터 안식일이 시작한다 하여 호텔로 돌아오는 유태인 거리는 말쑥하게 정장을 차려 입은 가족들이 회당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들은 가게 문을 닫는 것은 물론이고 자동차 운행도 절대 안하고 심지어 엘리베이터

버튼 누르는 일조차 하지 않아 아예 층층이 서도록 해 놓았단다.

 어떤 어린이는 엘레베이트 문 앞에 서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다른 사람이 타기 위해

문을 열 때 그 때를 이용해 얼른 탄단다.

예루살렘 게이트 호텔에 투숙했다.

저녁 식사 때 신부님께서 포도주를 쏘셨다.

 

10월 9일(토)

동쪽 문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스테파노 성인께서 이 문 밖에서 순교 당하셨다 하여 스테파노 문이라고도 하고 이 문에 사자 상이 붙어 있다고 유태인들은 사자 문이라고도 하며, 마리아 문이라고도 부른단다.

동네 애들이 올리버 가지를 꺾어 들고 사라고 하며 따라 다녔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이 올리버 가지를 흔들며 환영하였다(마태 21:6-11)하여 그런가 보다.

 

성 안나 성당

1100년 발드윈의 부인에 의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되었는데 성벽으로 된 천장과

아름다운 둥근 지붕과 고딕식 입구를 가지고 있었다. 이곳은 성모님께서 태어 나신 곳이고 성모님의 부모님(요아킴과 안나)의 집이라 했다. 성가 238번 “자모신 마리아”를 부르며

묵상했다.

인솔자 이 주연(미카엘라)씨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성가 249번 “지극히 거룩한 동정녀”를 불렀다. 울려 퍼지는 여운이 무척 듣기 좋았다.

 

골고타 언덕과 십자가의 길

예수님께서 채찍을 맞으신 것을 기념하는 채찍질 성당을 찾았다.

 그 맞은편에서 십자가를 지셨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걸으신 골고타의 길을 따라 우리는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며 걸어갔다.

 1처에서 9처까지는 길에서 했는데 성역화 되지 않아서 길은 비좁았고, 길 양쪽에는 가난한 아랍인들이 의류, 돌, 각종 특산품들을 파는 영세 상점들이 즐비했다.

 물건 사고 파는 사람들로 떠들썩했다.

2처 자리는 그 때의 바로 그 바닥이란다.

피로 물든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 했다.

 3처에서 예수님께서 첫 번째 넘어 지실 때 짚으셨던 손자국이 벽에 남아 있었다.

십자가가 세워졌던 곳에 손도 집어 넣어 보았다.

 

 

예수 무덤 성당

묻히시다(요한 복음 19장 38절-42절, 마태 27:57-61, 마르 15:42-47, 루까 23:50-56)

 그 뒤에 아르마테아 출신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게 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다인들이 두려워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가 허락하자 그가 가서 그분의 시신을 거두었다. 언젠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도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왔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다인들의 장례

관습에 따라, 향로와 함께 아마포로 감쌌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정원이 있었는데, 그 정원에는 아직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새 무덤이 있었다. 그날은 유다인들의 준비일이었고 또 무덤이 가까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그곳에 모셨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 왕후는 80세의 고령으로 이스라엘 성지 순례의 길을 떠나 예수님의 무덤과 십자가, 승천하신 곳을 발견하고 그곳에 각각 성당을 지었다,

 예수님의 실제 무덤은 109년까지 존재하였으나 칼리프 하캠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던 것을 헬레나 성녀에 의해 복구되었다.

이 성당에는 헬레나 성녀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예수님의 무덤을 막았던 바윗돌은 순례 객들이 쪼개어 가져가는 바람에 지금은 조그만

돌멩이가 되어 유리 상자 속에 보관되어 있었다.

 

 

우리 교회는 부활 신앙을 믿기 때문에 처형된 장소보다 묻힌 장소를 더 중요시한단다.

 이 무덤 성전을 중심으로 숱한 다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씁쓸해졌다.

 지금도 가톨릭,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곱트 교회, 에디오피아 정교회 등 6개 종파가 하나의 성전을 갈기갈기 찢어 소유하고 있으니......

오전 10시에 예수 부활 성당에서 미사를 드렸다. 우리 하늘의 문Pr. 단원들을 위하여

미사를 봉헌했다.

 제대 오른편에 예수님께서 채찍질 당하실 때 묶여져 있었던 기둥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리스도의 수난(Passion of Christ)" 영화 장면이 눈에 그려졌다.

34년 간 이 곳에서 생활하셨다는 프란치스꼬회 안 베다 수사 신부님(83세)을 만났다.

 연세에 비해 정정하셨다.

오늘은 갈릴레아에서 자고 내일 예루살렘에 다시 온다고 했더니 내일 선물을 가지고

호텔로 오시겠단다.

 

통행세를 내고 이디오피아 정교회(시바의 후예들) 수사회를 통과했다.

통곡의 벽 앞에 왔으나 오늘이 안식일이라고 (이 곳은 유태인 지역이라) 사진 촬영조차

금하고 있었다.

 벽 틈새에 자기의 소망을 적은 쪽지가 수도 없이 꽂혀 있었다.

유태인들은 이 곳을 신앙의 원천이라 믿는 중요한 장소라 한다.

큰 광장은 수천 명이 예배드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남쪽 문을 통하여 예루살렘 성을 나왔다.

구, 신약을 통틀어 예루살렘이라는 단어가 640번이나 나온단다.

공원 잔디밭에서 우리 교포가 준비해 준 도시락을 먹고 오후 1시 20분 갈릴레아로 향하여

출발했다.

 갈릴레아 호수는 너무 커서 갈릴레아 바다라고도 부른단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요르단강은 팔레스타인 자치구여서 통제구역이라 갈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곳에서 발을 담그고 성서 말씀을 들었다.

 

세례를 받으시다(마태오 복음 3장 13절-17절, 마르 1:9-11, 루까 3:21-22)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레아에서 요르단으로 그를 찾아가셨다.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면서 그분을 말렸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이 예스님의 뜻을 받아 들였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헤엄치며 다니며 다리를 건드리는 작은 물고기들이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티베리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1시간 가까이 갈릴레아 호수 위를 떠다니며 성가 480번

“믿음으로“와 청소년 성가 316번 ”나를 따르라“를 불렀고, 마태오 4:18-22, 요한 21:1-14,

마르꼬 6:14-52의 말씀을 들으며 묵상했다.

호수 위에 떨어지는 일몰의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갈릴레아 호숫가 엔게브라는 곳에 호텔을 정했다.

 펜션처럼, 휴양림처럼 한 채씩 투숙하도록 되어 있고 방도 두 개나 있었다.

예루살렘 호텔에 큰 가방을 두고 왔으니 오늘은 외박하는 셈이었다.

 저녁 식사 때 홍 마르타가 포도주를 쏘았다.

 이러다가 성지 순례 끝나면 술 늘겠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며 웃었다.

이차로 갈릴레아 호숫가에서 물결 소리를 들으며 포도주 한 병을 나눠 마시면서 즐겁게

얘기 나누며 놀았다.

술이 약한 신부님께서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계시기에 각자 방으로 헤어졌다.

 

 

10월 10일(일)

비 오는 소린가 했더니 갈릴레아 호수에 물결치는 소리였다.

그 소리에 새벽에 잠이 깨어 다시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자는 마르타에게 방해 될까봐 옆방에서 그간 순례하면서 메모한 것들을 대강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침에 밖에 나오니 호수가 워낙 크다보니 파도치듯이 출렁이는 잔 물결 소리와 화창한 날씨로 무척 상쾌했다.

호숫가에서 아침 식사시간 될 때까지 사진 촬영을 하며 놀았다.

이젠 모두 익숙한 사이가 되었다.

 

 

마태오 복음 8장 28절-34절 (마르 5:1-20, 루까 8:26-39)

 

예수님께서  건너편 가다라인들의 지방에 이르셨을 때, 마귀 들린 사람들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그들은 너무나 사나워 아무도 그길을 다닐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하고 외쳤다. 마침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놓아 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마귀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쫓아내시려거든 저 돼지 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가라." 하고 말씀하시자, 마귀들이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걌다. 그러자 돼지 떼가 모두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물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로 가서는, 이 모든 일과 마귀 들렸던 이들의 일을 알렸다. 그러자 온 고을 주민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나왔다.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시고 청하였다. 

 

 

예수께서 마귀 들린 사람들에게 그 악령을 돼지들에게 들어가게 하신 기적을 행하셨던

그 돼지 기르던 곳을 지나, 베싸이다 지방을 지나 3년 간 공생활을 하시고, 예수님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가파르나움으로 갔다.

가파르나움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가르치셨고(마르 1:21, 루까 4:31),

백인 대장의 하인과(마태 8:5-13, 루까 7:1-10, 요한 4:43-54), 베드로의 장모와(마태 8:14-17, 마르 1:29-34, 루까 4:38-41), 중풍 병자와(마태 9:1-8, 마르 2:1-12, 루까 5:17-26),

소경 두 사람을 고치시고 벙어리를 고치셨으며(마태 9:27-34), 오그라던 손을 펴 주시고,(마태 12:9-14, 마르 3:1-6, 루까 6:6-11),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는 기적(마태 9:18-26,

마르 5:21-43, 루까 8:40-56)을 행하셨으며, 기적을 가장 많이 행하신 동네에서 회개하지 않으므로 그 도시들을(코라진, 베싸이다, 가파르나움) 향해 저주를 하셨다.(마태 11:20-24, 루까 10:13-15)

“베드로의 집”에서 주일 미사를 드렸다.

신앙 생활을 쉬고 있는 김 정숙을 위해 생미사를 봉헌했다.

 1922년에 생긴 기념 교회로서 성 프란치스꼬 수도원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주의 성가정 성당이라고도 한단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체취가 가장 많이 머문 곳이란다.

 바닥을 유리로 만들어서 그 당시의 집터가 내려다보이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주위에도 그 당시의 집터가 많이 남아 있었다.

 

진복 팔단 성당

참행복(마태 5:3-10, 루까 6:20-2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곳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지붕 돔 아래로 팔각형으로 되어 있고, 예수님께서 산상 설교에서 말씀하신

참된 행복이 한 면에 한 구절씩 적혀 있었다.

 교황 바오로 6세(1964년)와 요한 바오로 2세(2000년)께서 방문하실 때 기증한 영대가

 보관되어 있었다.

 글라라 수도원에서 관리하고 있다고 했다.

 갈릴레아 호수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는 명성처럼 정말 주위 경관이 너무나도

좋았다.

 

 

가톨릭 성가 402번 “세상은 이름다워라”라는 성가가 절로 불려졌다.

모두 모여 서서 “오 아름다워라. 찬란한 세상, 주님이 지었네.”하고 성가를 부르고 있는데 외국인 순례자 몇 명이 가까이 오더니 기타를 치며 자기 나라말로 함께 따라 부르고,

 다른 일행은 비디오를 찍고 있었다.

 이 성가를 자기 나라 수녀님이 작곡했단다.

 

성가 402번 “세상은 아름다워라”

 

(후렴)오 아름다워라 찬란한 세상 주님이 지었네

오 아름다워라 찬란한 세상 주님과 함께 살아가리라

 

(1절)온 세상 만민이여 주를 찬양하라

그분의 위대하심을 높이 찬양하여라(후렴)

 

(2절)해와 달과 별들이여 주를 찬양하라

그분의 영원하심을 높이 찬양하여라(후렴)

 

(3절)눈과 비와 우박들도 주를 찬양하라

그분의 엄위하심을 높이 찬양하여라(후렴)

 

(4절)바다 속의 고기들도 주를 찬양하라

그분의 전능하심을 높이 찬양하여라(후렴)

 

(5절)높은 산과 언덕들도 주를 찬양하라

그분의 오묘하심을 높이 찬양하여라(후렴)

 

 

답가 빵의 기적 성당

오천 명을 먹이시다 (마태 14:13-21, 마르 6:30=44, 루까 9:10-17, 요한 6:1-14)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 곳으로 물러 가셨다.

그러나 여러 고을에서 그 소문을 듣고 군중이 육로로 그분을 따라 나섰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저녁 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 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로 가져 오너라." 하시고는,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먹은 사람들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행하신 곳으로,

 독일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1932년 지하에서 오병이어의 모자이크가 발견되어 제대 앞 바닥에 옮겨 놓아져 있었고,

 고기를 구워 먹었던 흔적이 남아 있는 바위도 옮겨져 있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막달라 마리아에게 갈릴레아로 가라고 일러 주신 후,

답가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단다.

 

 

베드로 수위권 성당

베드로의 고백 (마태 16:13-20, 마르 8:27-30, 루까 9:18-21)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던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아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본래 채석장 자리로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마태 16:18)” 하셨던

그 반석이 제대 앞에 있었다.

 

 

부활 후 세 번째 나타나신 곳(요한 21:15-19)이라 했다.

이 성당도 갈릴레아 호수 옆에 위치해 있었다.

점심 식사에는 큰 밀가루 빵과 함께 “베드로의 고기”(요한 21:1-11)가 구워져 나왔다.

우리 나라 넙치와 비슷하게 생긴 제법 큰 고기였다.

어제 공원에서 점심 식사한 후부터 다리가 가렵기에 벌레에 물렸나 했더니 두드러기처럼

두 다리가 엉망이어서 가이드에게 약을 얻어먹었다.

 다리만 그런걸 보니 음식 탓은 아닌 것 같고, 홍 마르타가 준비해 온 연고도 발랐다.

오후에는 예수님께서 어린 시절을 보내신 나자렛 지방 가나로 갔다.

 

 

가나의 혼인 잔치(요한 2:1-11)

 

사흘째 되는 날, 갈릴레아 가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그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으셨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셨다.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거기에는 유다인들의 정결례에 쓰는 돌로 된 물독 여섯개가 놓여 있었는데,

 

 (그래서 제대 위에는 6개의 물동이가 놓여 있었다.)

모두 두세 동이들이었다. 예수님께서 일꾼들에게 "물독에 물을 채워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물독마다 가득 채우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 하셨다.

그들은 곧 그것을 날라 갔다. 과방장은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에서 났는지알지 못하였지만, 물을 퍼 간 일꾼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과방장이  신랑을 불러

그에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셨군요."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레아 가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첫 기적을 행하신 가나의 혼인 잔치 성당을 방문했다.

“ 사흘째 되는 날”(요한 2:1)로 시작되는 성서 구절을 본떠서 결혼식을 사흘째 되는 날

 많이 한단다.

 

 

주의 탄생 예고 대성당

예수 탄생의 예고(루까 1:26-38)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레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 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 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달이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이 성당은 성모님께서 사시던 집 위에 세웠단다.

성당 안팎 벽에 각 나라 고유 의상을 입고 예수님을 안으신 성모님 그림이 붙어 있었다.

 

 

우리 한복을 입으신 성모님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삼종 기도와 성가 236번

 “사랑하올 어머니”를 불렀다.

요셉 성인의 목공소가 있던 곳에는 "성 요셉 성당"이 세워져 있었다.

성가 280번 “성 요셉 찬가”를 불렀다.

갈멜산으로 갔으나 오늘 주일이라서 들어 갈 수 없었다.

 해발 388m로서 이스라엘 국립 공원이며 갈멜 수녀원이 있단다.

3대 종교(가톨릭교, 이슬람교, 유태교)가 성지로 여기고 있단다.

지중해에 떨어지는 해를 보면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베틀레햄과 소경을 고치시고(마르 10:46-52, 마태 29:29-34, 루까 18:35-43) 성서에 여러 번 나온 예리고는 팔레스타인 자치구 지역이라 갈 수 없어서 무척 아쉬웠다.

 

4박 5일의 이스라엘 일정이 오늘로서 마지막이라 예루살렘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말씀 나누기를 했다.

사실 그동안 빡빡한 일정과 피곤에 지쳐 모일 시간조차 갖지 못했다.

가이드가 지명하는 대로 한 사람씩 마이크를 잡고 간단한 자기 소개와 감명 깊었던 일과

장기 자랑을 했다.

 나는 선교 본당인 범물 본당 신자답게 먼저 “모이자, 기도하자, 나가자, 선교하자.”

라는 구호를 외쳤다.

 가장 감명 깊었던 일은 시나이 산에서 결혼 32주년 축하 미사를 봉헌했던 일과

겟세마니 성당에서의 느낌을 얘기했다.

그리고 달 타령을 개사하여 불러(박자 엉망, 음정 엉망이었지만) 모두들 우습다고

박수를 쳐 주었다.

이 주연(미카엘라)씨는 부모님을 모시고 오신 수녀님을 보니 병환 중에 계시는 아버지와

일찍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 생각이 난다고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호텔에 돌아오니 어제 뵈온 안 베다 수사 신부님께서 기다리고 계셨다.

이런 일은 처음이시라면서 골고타 돌이 박힌 십자가와 묵주와 상본 들을 선물로 나누어 주셨다.

회장님께서 쏘시는 포도주를 곁들여 안 신부님과 함께 호텔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비록 연세는 많아 늙으셨지만 무척 유모러스하고 소탈하신 분이었다.

샌들 사이로 보이는 그 분의 거칠기 짝이 없는 맨발이 타국에서의 고달프고 외로운

수도 생활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내일 로마로 향하기 위해 12시 30분에 모닝콜이라 억지로 잠을 청하는데 옆방에서

낮에 산 망고를 나누어 먹자고 부르기에 잠옷에 슬리퍼 바람으로 옆방에 가서

망고를 먹으며 얘기를 나누었다.

빠른 시일 내에 중간 지점에서 만나 국내 성지 순례를 같이 하자고 다짐했다.

 

 

 

10월 11일(월)

깜빡 잠이 들었는가 했는데 홍 마르타가 나를 깨웠다.

 마르타는 이것저것 정리하느라 한 숨도 못 잤단다.

 호텔에서 준비해 준 뜨거운 차와 빵으로 속을 다스린 후 전세 버스로 20여분 달려서

텔아비브 공항에 도착했다.

이 곳 가이드 김 형(엘리사벳)씨와 아쉬운 작별을 나누었다.

엘리사벳씨는 가려운데가 좀 어떠냐고 걱정하면서 약을 더 나누어 주었다.

입국 때와 마찬가지로 입을 맞춘 인터뷰와 엄격하고 삼엄한 검색을 통과했다.

기내식으로 나온 아침을 먹고 오전 8시 30분쯤 이탈리아 레오나르드 다빈치 공항에 도착했다.

 외국인 스튜어디스가 무엇을 먹겠느냐고 묻는 것 같기에 손짓으로 옆에 것과 같은 것을 달라고 했더니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애먹었다.

비행기 안도 너무 좁고 불결한 것 같고 무척 소란스러웠다.

 전에는 안 그랬는데 이번에는 착륙시 귀가 무척 아프고 가렵기까지 했다.

창 밖을 보니 비행기 날개에 무지개가 예쁘게 걸려 있었다.

버스를 타고 먼저 아씨씨로 향했다.

 이번 가이드는 장 영희(글라라)씨였다.

이 곳 에서는 소변을 “삐삐”라 하고 대변을 “까까”라 한다 하여 모두 웃었다.

화장실 한 번 가는데 1명에 50센트(750원), 2명에 1유로고, 생수 역시 1 유로를 받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3000원 짜리 칼국수를 먹어도 커피를 무료로 주는데(비록 셀프이지만), 식당에서 밥 사 먹고도 비싼 생수 값을 내어야 된다니, 우리나라만큼 인심 좋은 곳도 없다고

모두 입을 모았다.

 

아씨시는 로마에서 북동쪽으로 160km 떨어진, 인구 2만 5천명 밖에 안 되는 작은 도시로

프란치스꼬 성인이 태어나시고 돌아가신 성지이다.

거리마다 제라늄이 예쁘게 피어 있었고 매혹적인 전망을 볼 수 있으며, 분수가 아름다운 광장이 있어 더욱 낭만적인 마을이었다.

돌로 쌓은 2,3층 정도의 낮은 집만 있었고(심지어 우리가 투숙한 호텔까지) 성당을 중심으로

모든 생활이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이태리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성 프란치스꼬 대성당으로 갔다.

 

 

성 프란치스꼬 성인과 성 프란치스꼬 성당

성 프란치스꼬 성인은 1182년 아씨시에서 큰 포목상을 경영하는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지식을 겸비한 호탕한 청년으로 자신의 젊음과 재산을 낭비하며 지냈으나 아씨시와 페르시아간에

벌어진 전쟁터에서 포로로 잡히고, 병으로 눕게 되면서 마음의 변화를 일으켰다.

“무엇이 내 삶에 의미를 준단 말인가?” 하고 자문하던 중에 나병 환자를 만나 강한 충동으로

나병 환자의 손에 자기 입을 맞추면서 나병 환자에게 자비를 베풀기 시작했고, 반쯤 허물어지는 다미아노 성당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십자가상에서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 세워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아버지의 재산으로 성당 보수비를 마련했다.

화가 난 아버지와의 소송에서 “나는 당신의 아들이 아니고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말하며 입고 있던 의복과 소지품 일체를 아버지에게 돌려주고, 청빈을 모토로 오로지

주님 말씀에만 관심을 갖고 살았다.

“나는 가난과 결혼하려고 한다.”는 자세를 굳히고, 미사 도중에 마태 복음 10장 9절에서 10절의 말씀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을 듣고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손뼉을 쳤다 한다.

그래서 청빈의 덕을 생활로 삼아 감화 받은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12명의 제자를 두게

되었고,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인가를 얻어 ”작은 형제회“라는 수도회를 창설하였다.

1224년 알베나 산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로부터 주의 상처와 같은 오상을 받게 되어 2년 간 예수님의 고통을 체험하며 죽을 때까지 설교를 계속하여 그리스도와 같이

 완전한 가난 속에서 주님의 뜻에 맞는 생활을 하였다.

성인은 날아다니는 새에게까지 주님의 복을 전했고, 사나운 늑대도 유순하게 했으며

대자연을 통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다.

“태양의 찬가”와 “평화의 기도”는 지금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평화의 기도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꼬 성당은 그가 세상을 떠난 1228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230년에 그의 유해가 .

이장되어, 그 위에 2층의 성당이 세워졌다.

아래층은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둥근 천장 건물이며 위층은 이태리 초기 고딕 양식 건물이다.

청빈, 정결, 순명을 나타내는 모자이크가 이름답고, 성당 벽에는 성인의 생애를 28개의 장면으로 나뉘어 지오토의 프레스코화 벽화에 담겨 있었으나 시간 관계상 하나 하나 자세히 못 보고

 지나가며 스쳐 볼 수밖에 없어 무척 아쉬웠다.

 보관되어 있는 성인의 다 떨어진 옷에서 성인의 청빈했던 모습이 새삼 실감되었다.

정원에는 “성인과 새”, “성인과 늑대” 상과 가시 없는 장미도 아직 자라고 있었다.

 

 

 

 

글라라 성녀와 성녀 글라라 성당

성녀 글라라는 18세 사순절 때 지금의 성녀 글라라 성당에서 우연히 프란치스꼬 성인을 만나 그의 설교에 감화를 받아 프란치스꼬의 첫 여제자가 되었다.

아씨시 근교의 낡은 집에서 글라라회를 창설하여 침묵, 청빈, 단식을 통한 기도 생활을 했다.

빵 한 개로 많은 수녀들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났으며, 십자가를 긋자

기름 단지에 기름이 가득 채워졌으며, 후에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된 후고리노 추기경이 십자가를 그으며 식탁을 강복하자 빵마다 십자가 표시가 그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글라라는 “빛”이라는 뜻으로서 그녀의 성덕과 빛은 지금도 찬란하며, 주의 길을 따라

천국으로 향하는 자들의 앞길을 비추어 준단다.

성녀 글라라 성당은 1257년 건축이 시작되어 3년 후에 유해가 안장되었다.

성당 안에는 독특한 모양의 십자 고상(타우형 십자가)과 성 프란치스꼬와 성녀 글라라

두 분이 입었던 옷이 보관되어 있었고, 지하의 창살 사이로 보이는 글라라 성녀의 유해는 얼굴이 새까맣게 화석이 되어 700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

프란치스꼬 성인이 제자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수도 생활을 시작한 곳이란다.

성당 안 쪽 복도에 있는 성인의 석상에는 지금도 살아 있는 비둘기가 성인의 손 위에서

 나풀거리며 놀고 있었다.

 

세 성당을 둘러보고 주택처럼 낮고 아담한 그랜드 호텔에 투숙했다.

한국에서는 뷔페 식당에 가면 스파게티를 빼 놓지 않고 꼭 먹을 정도로 좋아했는데

점심과 저녁 연거푸 스파게티를 먹자니 질릴 지경이었다.

 

 

 

10월 12일(화)

아침 8시 버스를 타고 피렌체로 향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비가 촉촉이 내려 있었고 날씨도 제법 쌀쌀했다.

 이집트, 이스라엘에서는 그렇게도 덥더니만, 어제 본 그 아름다운 경관들이 짙은 안개에 가득 싸여 더욱 더 아름답게 보였고, 구름 위에 떠 있는 기분이었다.

피렌체 시가 전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사진을 찍었다.

“ 피렌체를 내려다보는 다윗”상(미켈란젤로 작품)이 언덕 한가운데 우뚝 서 있었다.

 

 

피렌체 두오모 성당에 갔다.

 큰 성당 앞에는 세례당이 꼭 세워져 있단다.

이는 성당에 들어가기 전에 세례를 받고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들어가라는 뜻이란다.

피렌체 대성당

높이 160m의 거대한 주황색 돔은 미켈란젤로가 성 베드로 성당의 돔을 만들 때 참고했을

정도로 규모와 아름다움이 대단하단다.

 

 

시뇨리아 광장에 가니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관광객을 상대하는 장사꾼들도 많았다.

 

 

옛날에는 피렌체는 정치의 중심지였으나 지금은 카페 테라스가 있는 휴게 장소였다.

그 앞에는 베키오 궁전이 있었는데 외벽 공사 중이었고, 물을 다스리는 넵튠신의 분수도 있었고, 조국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모시모 데밀리치"의 기마상도 있었다.

피렌체는 가죽 제품이 유명한 곳이라 가죽 제품 가게가 많았다.

쇼핑할 시간을 주기에 구경 다니다가 난 남성용 벨트를 하나 샀다.

 

성 십자가 성당에서 미사를 드린 후 단테 생가를 둘러보고 3시간을 버스를 달려 밀라노에 도착했을 때는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밀라노 두오모 성당의 규모는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대단했다.

건축 기간은 5세기가 꼬박 걸렸는데 긴 공사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계획, 변경 없이 한결같은

양식으로 지어 졌단다.

늦은 시간이라 개방되지 않아 성당 안에 들어 갈 수 없어서 아쉬웠고, 사진이라도 찍도록 배려해 주지 않는 가이드가 야속했다.

이태리 최대의 고딕 양식의 건축물이며,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고딕 양식의 교회란다.

스테인드 글래스 창으로부터 들어오는 찬란한 빛을 받아 더욱 화려하고 장엄한 실내 장식은

 이태리 최고의 두오모라는 찬사를 받고 있단다.

밀라노 두오모 성당은 암브로시오 성인이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에게 세례를 준 곳이란다.

밀라노 대성당

 

오스트리아 통치 하에 세워진 오페라 하우스인 스카라 극장 앞도 지나 왔다.

서울에도 같은 이름의 영화관이 있다고 기억했다.

한국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밀라노 우나 호텔에 투숙했다.

 

 

 

10월 13일(수)

아침 8시 30분 밀라노를 출발하여 3시간 반 정도를 버스를 달려 피사에 도착해서 중국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피사갈릴레오 갈릴레이가 태어난 곳으로 피사의 사탑이 유명한 곳이다.

피사두오모 성당피사의 사탑이 나란히 있었다.

피사의 사탑은 1174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76년이나 걸려 완성되었단다.

 원래는 대성당의 종탑으로 건축된 것이며 지반이 약해서 조금씩 기울어지고 있는 것인데,

무너지지 않으니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라고 불릴 만 했다.

 혹시 더 기울어질까 봐 더 기울어지지 않도록 버티어 놓고 보수 공사 중이었다.

맨 꼭대기의 전망대까지는 294개의 계단이 있는데 올라가다 보면 저절로 몸이 기울어지게

걷게 된단다.

 이 사탑은 갈릴레이가 중력을 실험한 장소로도 유명하단다.

 

두오모 성당 안 소성당에서 미사를 드린 후 오후 3시 30분 피사를 출발했다.

로마에 도착하여 저녁 식사를 한 후 그랜드 호텔 티베리오에 투숙했다.

로마에서 유학 중인 대구 대교구 출신 신부님 네 분이 이 강재(요셉) 신부님을 만나기 위해 호텔 로비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내가 대구 범물 본당에서 왔다고 하니 한 신부님이 “우리 누나가 이번에 그 성당에 새로 부임한 수녀님”이란다.

 아니 이런 인연이 있을 수가! 너무 야위고 날씬하며, 가냘프게 보여서 코스모스 수녀님이라고 소개받은 곽 정혜(엘리사벳) 수녀님의 남동생 분이었던 것이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을 청했다.

 

10월 14일(목)

오전 8시 30분 호텔을 출발하여 바티칸 박물관으로 갔다.

 마당에 “최후의 심판”을 비롯한 벽화의 축소판 사진들을 여러 군데 놔두고 미리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입장하게 되어 있었다.

 설명을 들은 후 박물관 안에 들어가니 그 규모에 입이 벌어질 정도였고, 많은 사람들 때문에

수박 겉 핥기 식으로 앞사람 따라 뒷사람에 밀려 그냥 지나가면서 훑어 봐야 될 뿐이었다.

“최후의 심판” 그림은 교황님 선거가 끝나면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시스틴 성당 천장에

그려져 있었다.

 우리는 쳐다보기도 목이 아플 지경인데 저 높은 천장에 사다리에 올라서서 어떻게 200m가

넘는 저 큰 그림을 그렸는지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 작품에 나타나는 인물이 390명이나 된단다.

성 베드로 대광장에서 교황님을 뵐 수 없는 게 무척 아쉬웠다.

연로하시고 병약하신 교황님께서 창문을 통하여 광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강복을 주시는 날은

 교황님 방 창 밑에 깃발이 걸린단다.

광장에서 기념 사진도 찍고 성물방도 둘러보았다.

 

성 베드로 대성당

 

 

 

성 베드로 대성전 

 

점심을 먹고 오르비에뜨로 갔다.

 오르비에뜨는 산꼭대기에 만들어 놓은 작은 도시였다.

에스컬레이터와 마을 버스 그리고 버스만큼이나 큰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다.

오르비에뜨 두오모 성당 역시 너무나도 웅장하고 이름다웠다.

 성당 앞 벽이 전부 색유리로 모자이크되어 있었다.

이 성당 짓는데도 300년이나 걸렸단다.

 이 큰 성당들이 신자들이 찾아 와서 미사를 드리는 본래의 구실을 못 하고 관광지의 구실을

 더 많이 한다니.....

오후 5시 성체 성혈 기적이 일어난 곳에서 미사를 드렸다.

1263년 프라하의 비에뜨로 신부님이 성찬의 전례 중 “과연 이 밀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일까?” 하고 의심했더니 성작보가 피로 붉게 물들었단다.

지금도 제대 위쪽에는 그 때의 그 성작보가 오랜 세월에 비록 엷은 갈색으로 변하긴 했지만

유리 액자 속에 보관되어 있었다.

이런 장소에서 미사 중에 내가 독서를 읽어서 무척 감격스러웠다.

 

 

저녁 식사 후 호텔로 돌아 와서 총무 안 성자(마르타) 자매님 방에 모두 모여서 쫑파티를 했다.

내일은 비행기에서 밤을 보내니 오늘이 이번 순례 길의 호텔에서의 마지막 밤이었기

때문이었다.

낮에 슈퍼에서 산 오르비에뜨 산 포도주로 건배를 하고 이번 순례 길에 대한 느낌과

이런 저런 얘기들을 재미있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누다가 각자 자기네 방으로 헤어졌다.

 

 

10월 15일(금)

오늘이 비로소 이번 성지 순례의 마지막 날이었다.

며칠 전부터 다가오는 나날이 아쉬운 생각에 시간 가는 것조차 아깝더니

막상 아침에 일어나니 가벼운 맘으로 가방을 챙기게 되고 마지막 날이라는 실감이 들었다.

아침 식사 후 오전 8시 30분 대형 버스는 시내 진입이 금지된다 하여

오늘은 미니 버스로 순례 길에 나섰다.

로마에 온 후로 계속 오락가락 하던 궂은 날씨가 오늘은 아침부터 금방 비가 왔다,

금방 해가 났다 하면서 몇 차례나 변덕을 부렸다.

 이때까지는 버스 타고 있을 때나 밤에만 비가 와서 순례에 지장이 없었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몇 차례나 자꾸 우산을 폈다 껐다 하는 바람에 류남순이

미국 여행길에 사 준 앙증맞게 예쁜 버버리 우산이 망가져 버렸다.

그래도 이 나라 사람들은 비가 와도 뛸 생각도 않고 비를 그냥 맞으며 일정한 속도로 걷고

있었다. 참 느긋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성모 마리아 대 성당

로마시에서 둘째로 큰 성당으로 리베리오 교황을 기념하는 곳이기에 리베리우스 성당이라고도 부르고, 전설에 의하면 8월 여름 밤에 눈이 내렸다 하여 그래서 그 기적으로 성당을 지었다 하여 설지전 성당이라고도 부른단다.

 그래서 제대 위에는 리베리오 교황과 요한 성인이 눈을 쓸고 있는 그림이 붙어 있었다.

 지하 소성당에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구유 조각을 보관해 둔 금색 함이 있었고,

교황 보니 8세의 기도하는 모습을 조각한 큰 조각상이 있었다.

 

  라떼라노 성 요한 대 성당

그리스도교 최초의 교회로써 베드로 성전이 생기기 전까지 교황청으로 사용했단다.

지붕 위에는 14명의 사도와 성인들이 십자가를 들고 계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조각이 있었다.

이곳에서 신, 구교 일치를 위한 라떼라노 공의회가 다섯 차례에 걸쳐 개최되었으며

1300년 교황 보니 8세가 이 성당에서 희년을 선포했단다.

 

성 계단 성당

성 요한 라떼라노 대성당 오른편에 있는 성당으로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명령을 받고

돌아가시던 날 몇 번이나 모욕과 고통을 받으며 오르내리셨다는 28층계의 계단이 있었는데, 이 계단들은 콘스탄티노 황제의 어머니인 성녀 헤레나 황후가 예루살렘 성지 순례 길에 수난 받으시기 시작하였던 총독 관저에서 재판을 받으시던 예수님의 모습(마르 15:1-15)을 생각하며,

예수님께서 오르내리셨다고 하는 관저의 계단을 모두 걷어내어 로마로 옮기게 했단다.

많은 순례 객들이 무릎을 꿇은 채로 기도를 드리며 이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계단 입구에는 로마 병정에게 넘겨주기 직전 예수님께 입을 맞추는 유다(마르 14:45)의 조각상과,

군중들에게 “그러면 여러분이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부르는 이 사람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 것이오?”

(마르 15:12) 라고 묻는 빌라도의 조각상이 있었다.

 

마음 좋은 젊은 기사 아저씨 덕분으로 성 밖에 있는 바오로 성당을 가면서 시내 드라이브를

했다. 영화 “벤허”의 촬영 무대였던 25만 명을 수용한다는 대전차 경기장도 보았고,

로마의 가장 중심 지역에 있는 로마 황제 관저 앞도 지났고, 그리이스 로마 신전들도 보았다.

 

꼴로세움은 글라데이터의 촬영 현장이었던 검투 경기장으로서 45층 높이의 원형 경기장이며 5만 관객을 수용할 수 있단다. 계단으로 이루어져 앉아서 관람할 수 있게 되어 있고, 십자가를 모신 장소가 로얄 박스였다.

교황님께서 야외 미사를 이 곳에서 봉헌하시기도 한단다.

꼴로세움의 뜻은 “거대하다”라는 뜻이며, 원형 경기장 바닥에 있는 모래를 “아레나”라 한단다.

폭군 네로가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하고자 이 경기장에서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굶주린 사자들이 달려들도록 한 장면을 영화 “쿼봐디스”에서 봤던 기억이 났다.

 

베네치아 광장을 거쳐 콘스탄틴누스 황제가 만든 개선문과 FAO 국제 식량 기구 앞을 지나

에집트보다는 규모가 작았지만 로마에서도 피라미드를 보았다.

로마의 유적들을 다 보자면 한 달 동안 머물러도 모자랄 것 같았다.

 

 

 성 바오로 대 성당

성 베드로 대 성당, 라테라노 대성당, 성모 설지전 대성당과 더불어 로마 4대 대성당 가운데

하나이다.

다른 성당은 다 성 안에 있으나 바오로 사도가 이방인으로서 이교도의 앞장자였으므로

이 성당만은 성 밖 로마 시내와 바오로 사도의 순교지인 트레폰타네 사이에 있었다.

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바오로 사도의 묘소 위에 처음으로 성당을 세웠고,

395년 호노리우스 황제가 대성당을 세웠으나 1823년 7월 15일 화제로 전소되어

지금의 대성당은 1854년 12월 10일 비오 9세 교황이 성모 무염 시태 교리를 선포한 지

이틀만에 축성한 것이란다.

성당 안에는 신랑이 다섯, 대리석 기둥이 넉 줄인데 한 줄에 기둥이 스무 개씩 도합 80개가 되어 마치 기둥숲 같았다.

제대에 부활 초를 꽂는 대형 촛대가 너무 인상적이었고, 중앙 열을 따라 역대 교황님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는데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초상화에는 환하게 불이 밝혀 있었다.

성당 정면 앞 마당에는 바오로 석상이 우뚝 솟아 있었는데, 한 손에는 성서, 한 손에는 칼을 쥐고 있는데, 이는 복음을 전하다가 참수 당했다는 뜻이란다.

이 대 성당을 관리하는 베네딕토 수도원이 바로 옆에 있었는데 정원이 무척 예쁘게 꾸며져 있었고, 고대 콘스탄티노 성당에서 찾아 낸 비석과 글씨등 유물들이 많이 보관되어 있었다.

 

이태리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카타콤베로 갔다. 카타콤베 입구에 영화 “쿼봐디스”의 한 장면인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 “도미네 쿼봐디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여쭈어 본 후

 다시 로마 성 안으로 들어 가 붙잡혀 순교한 것을 기념하는 쿼봐디스 성당이 있었으나

휴식 시간이라 문이 닫혀 있어서 아쉽게도 들어가지 못 했다.

 

 

카타콤베는 지하 묘지로서 매장을 위한 장소로 그쳤으며, 그리스도인들이 여기 모여서 장례

의식을 거행하기도 했단다. 박해 중에 임시 피난처로 삼아 성찬을 거행하는 장소로 쓰였던

장면을 영화 “쿼봐디스”에서 봤으나, 그런 적은 결코 없었으며, 이런 이야기는 순전히 전설이거나 소설과 영화에서 꾸며 낸 이야기에 불과 하단다. 박해가 끝나고 성 다마소 교황 시대에 와서부터 순교자들을 모시는 본격적인 성지가 되었고, 그리스도교 순례의 중심지요,

신앙심의 중심지가 되었단다.

우리가 본 것은 성 칼리스토 카타콤베로서 2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가장 크고 비중 있는

 카타콤베 중의 하나였다.

지하에 파 놓은 무수한 갱도들이 그물처럼 얽혀져 있는데 이것들을 다 합하면 대략 20Km가

넘는단다. 여러 층으로 파여 있어 깊숙한 곳은 지하 20m가 넘을 정도이고, 순교자가 10여명,

교황님이 16명 묻혔으며 그 곳에 묻힌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숫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단다.

카타콤베 입구

 

성녀 세실리아 무덤

그녀는 남편을 개종시키고, 초기 공동체를 위해 많은 헌신을 하다가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에 일어난 박해 때 두 사람 다 순교하였다.

 성녀는 순교 사상 처음으로 목욕탕에서 증기로 질식시켜 죽이는 방법으로 처형되었으나

실패하자 다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1599년 카를로 마데르노라는 조각가가 성녀 세실리아 조각하여 성당 지하에 있는 성녀의 무덤 앞에 봉헌하였다.

이 곳 카타콤베에 있는 석상은 그 작품을 그대로 복사하여 놓은 것 인데,

목 부분에 잘린 모습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고, 오른쪽 손가락 셋을 펴고 있는 모습은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성부, 성자, 성령은 일체라는 것을 표현한 것이란다.

 

카타콤베 안은 아직도 개발 중이었고, 붕괴 가능성이 있는 위험한 곳은 출입 금지토록 되어

있었다.

카타콤베 안에 미사할 수 있도록 마련 된 곳에서 오후 3시 순례지에서의 마지막 미사를 드렸다. 모두들 무사히 순례를 마칠 수 있었음에 감사 드렸다.

 빡빡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매일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해 주신 하느님의 은총에

더욱 더 감사 드렸다.

 미사 드릴 장소를 물색해 준 세 가이드, 미사를 집전해 주시고 그 장소에 적절한 강론을 해 주신 이 강재(요셉) 신부님, 전례를 맡아 준 한 경희(카타리나) 자매님, 성가를 골라 준 이 주연(미카엘라) 자매님, 한 마음이 되어 미사에 참례한 우리 모두에게 감사할 뿐이다.

손을 잡고 주의 기도를 바치고, 포옹하며 평화의 인사를 나눌 때 흘렸던 뜨거운 눈물은 모두 아무도 잊지 못 할 것이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왔던 진실의 입을 구경한 후 베르니니의 작품인 뜨레비 분수로 갔다.

많은 사람들이 들끓고 있었고, 특히 소매치기에 조심하라는 가이드의 주의가 있었다.

뒤로 돌아서서 동전을 던지는 여행자는 또 다시 로마로 돌아온다는 전설이 있다기에

“나도 로마에 한 번 더 올 수 있었으면.....” 하는 염원으로 비를 맞으면서 동전을 던졌다.

홍 마르타는 “2000년도에 이 곳에 와서 동전을 던졌기에 이번에 또 왔나 보다.

또 한 번 더 오자.” 하면서 동전을 던졌다.

이 동전들은 로마시가 불우 이웃을 돕는데 쓴단다.

 

 

오후 5시 한국 식당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오후 8시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레오나르드 다빈치 공항으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마지막 마무리를 하고, 가이드에게 감사의 인사와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비행기에서 하룻밤을 정말 지루하게 보내다가 무려 10시간 남짓 만인 오후 2시 20분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우리들은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각자 헤어졌다.

 

나는 인천 공항 앞에서 대구행 고속 버스를 탔으나 주말이라 얼마나 밀리던지

밤 9시가 지나서야 동대구 터미널에 도착했다.

고맙게도 남편이 마중 나왔기에 편히 집에 돌아 왔다.

집에 와서는 짐 풀고 그간 얘기 나누느라 바빴다.

 

이 기행문을 쓰고자 나름대로 틈틈이 메모도 열심히 했었는데 막상 쓰려니 기억이 잘 나지 않고 사진을 봐도 그 성당이 그 성당 같아 헷갈려서 무척 애먹었다.

 

 

   

그 후 11월 16일 우리들은 충남 예산군 대흥면 대율리 대율 공소가 친정인

 전 인숙(마리아) 수녀님 댁에서 모였다.

나는 남편 출근 길에 동대구 역에서 천안행 새마을 열차를 탔다.

서울 발 예산행 기차를 타고 오는 일행들을 만나기 위해 나는 천안에서 내려 거의 뛰다시피 하여 예산 가는 기차를 바꿔 탔다.

 기차 안에서 만나는 그 기쁨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홍 마르타는 서울에 있는 중이어서 흑석동 팀과 같이 오고 있었다.

수녀님께서 예산 성당 승합차를 빌려서 예산 역에 마중 나와 계셨다.

때 맞쳐 한국에 휴가를 나온 이스라엘 가이드 김 형(엘리사벳) 자매님과 의정부 일행을 태워

오시는 신부님을 기다려 수녀님 친정으로 갔다.

흑석동에서 한 자매님이 못 오시고 전주에서 회장님 내외분께서 불참하신 게 섭섭했다.

 아버지께서 공소 회장이신 대률 공소 건너편이 집이었다.

고모님께서도 우리를 맞이하고자 와 계셨다.

집 안에 들어서니 성지 순례때 찍은 사진들을 같은 크기로 확대해서 액자에 넣어 걸어 놓은게

무척 보기 좋았다.

잔칫상처럼 잘 차려진 밥상을 받았다.

그런데 군인 신분이신 신부님께서 전화를 받으시더니 우려했던 일이 생겼다면서 잘 잡수시지도 못하고, 쉴 틈도 없이 곧바로 수원으로 가셔야 했었다.

식사 후 근처 성지에서 미사를 드리면서 성지 순례에서의 그때 기분을 만끽하려고 했었는데

너무 아쉬웠다.

내가 기행문을 곁들여 만든 앨범을 보여 드렸고, 만들어 간 종이 묵주도 나누어주었다.

많은 칭찬을 받아 기분 좋았다.

점심 식사 후 예산 성당 승합차를 수녀님께서 운전하시고는 우리들을 성지 갈매못으로 데려

가 주셨다.

이 곳은 황 석두(루까)와 장 주기(요셉)와 안 돈이(다블뤼) 주교님과 민 위앵신부님께서 군문 효수 당하신 곳이었다.

이 곳 담당 수녀님께 자세한 설명을 듣고 이 곳 저 곳을 둘러보며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을 먹고 다시 아쉬운 작별을 했다.

다른 사람들은 서울행 기차를 타고, 나는 대구행 기차를 탔다.

 

 

12월 25일 왜관에서 피정을 마친 김 형(엘리사벳)씨와 서울에서 이 주연(미카엘라)씨가

대구에 왔기에 홍 마르타와 나는 성모당, 관덕정, 한티를 안내했다.

서울 흑석동 팀들도 오려고 했었는데 모두들 사정이 허락지 않아 못 왔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다니기에 무척 애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