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20/07/31(금) 큰 오빠 50주기에.......

김혜란골롬바 2020. 8. 1. 14:36

1946년 4월 우리 집에서는 세 아이(8세, 5세, 4세)가 한꺼번에 홍역을 하더란다.

8살 짜리인 큰 오빠는 홍역 끝에 백일해를 얻어서 32년 평생을 몇 차례의 고비를

넘기다가 결국 50년 전(1970년 7월 마지막 날)에 세상을 떠나셨고,

5살짜리 딸을 산에 묻고 오니, 작은 아들(東昭 오빠)도 또 보낼 것 같더니

억지로 살더라네!

우리 큰 오빠는 병약한 거 빼고는 183cm의 훤칠한 키에 미남이셨으며,

잦은 결석에도 공부를 너무나 잘 하셔서, 경북중학교와 경북대 사대부고를 졸업하신 후,

건강 때문에 결국 경북대 1학년을 다니시다가 중퇴하셨다.

1960년 사남매가 남산동 집에서

입, 퇴원을 헤일 수 없이 하다가 큰 오빠 때문에 1960년 5월에 그 당시 공기 좋다는

범어동에 집을 지어서 이사까지 했다. 

세상 떠날 때까지 범어 성당에서 교리 교사, 청년회, 성가대, 성당 안의 전기 기사로

봉사하셨고, 또 손재주가 좋으셔서 무엇이든지 척척 고쳐 내셨다.

아프신 중에도 기술학원을 다니시며 전파관리사 자격증을 따셨으며, 

교동시장에서 재료를 사 와서는 그 당시 귀한 트란지스터 라듸오를 뚝닥 만드셨다.

노래도 너무나 잘 부르셨으며, 특히 가톨릭 성가 151(“주여 임하소서”)을 울언니와

듀엣으로 종종 부르셨다.

 

1968년 가을에 찍은 가족사진

1969 626~29에는 왜관 성베네딕도 수도원 피정의 집에서 

대구대교구 제1차 꾸르실료를 수료 하셨다.

왼쪽 세째줄 첫번째가 큰 오빠

 

마지막 날 적십자 병원에서 장티푸스 진단을 받고는 법정 전염병이라고 대구 시립병원(現 대구 의료원)으로 옮기는 택시 안에서 자꾸 "어머니, 집에 가요!" 라고 조르더라네!

(그때는 그 병원가면 다 죽어서 나온다는 속설이 있었기에.....) 

울 엄마께서 할 수 없이 택시를 돌려 집으로 가는데, 엄마 무릎을 베고 숨을 거두셨다네.

울 엄마께서는 택시 운전사가 내리라 할까 봐 겁이 나서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으시면서 숨도 못 쉬시다가 집에 오셔서는 대성통곡!

나는 엄마 연락을 받고 남구청에서 조퇴하여 적십자 병원에 있다가

성당 형제님 두 분(故 김바오로님, 홍스테파노님)이 함께 택시를 타셔야겠기에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 중이었다.

그날 새벽에 엄마께서 고열로 밤새 신음 중이던 큰 오빠 방에 들어가셨더니 

"오늘이 마지막 날이네요." 하셔서,

"그게 무슨 말이니?" 하시자, 큰 오빠께서

"아니, 오늘이 7월 마지막 날이라고요."라고 말을 돌리셨다니

당신의 마지막 날을 미리 아셨던 듯?

 

5살에 떠나보낸 큰 딸, 62세로 세상 떠나신 울 아버지, 32살에 떠나보낸 큰 아들의 命을

다 이으시는 듯 96세까지 건강하고 깨끗하게 사셨던 한 많으신 울 엄마!!!

그 언니의 산소가 現 월성 지구감천리 천주교 묘지에 있었는데,

1980년 대 아파트 건립으로 이장하라는 공고에 엄마와 나는 천신만고 끝에

그 무덤을 찾았고, 화장하여 뿌리시면서 하시는 울 엄마의 넋두리!

"무슨 팔자에 에미가 딸의 무덤을 헤매어 찾아내서 이러는가?"

 

남편의 대구 첫 부임지가 북구 산격2동 동사무소였기에

나는 대구에서 오지인 산격2동 배자못 옆 주택 월세방에서 첫 살림을 시작했다.

울 엄마는 만삭인 나를 위하여 시장을 보시고, 반찬을 만드셔서

한 시간에 한 번씩 다니는 89번 버스를 반월당에서 바꿔 타시고는 우리 집에 오셔서

살림을 돌봐 주셨다. (그때 나는 진짜 이무 것도 할 줄 몰랐지!ㅋㅋ)

1973년 마지막 날에 울 엄마께서는 사위와 딸이 이틀 동안 먹을 것을 준비해 놓으신 후,

큰 아들 기일 추모 미사 참례하러 범어동으로 가셨다.

가시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불그스레한 이슬이 비치는 게 아닌가?

퇴근한 남편은 장모님 가시게 했다고 성이 나서 "진통 시작해도 나는 모른다!" 고

고함질렀고, 나는 밤새도록 배 아프다는 소리도 못 하고 끙끙거리다가

새벽에 남편을 깨워서 다니던 이기영 산부인과로 갔었고,

꼬박 12시간 진통 끝에 저녁에사 큰 딸을 낳았다.

그 이후 몇 해 동안이나 울 엄마께서는 큰 아들 기일 추모 미사와 외손녀 생일

챙기시느라 이틀 동안 바쁘게 움직이셔야 했다. 

 

송현동(성요셉 성당 )결핵 요양원을 설립하시고, 밀알회를 만드신 김동한 신부님(김수환 추기경님 형님)께서도 폐결핵으로 투병하시다가 돌아가셨기에,

큰 오빠를 기리는 마음으로 나는 밀알회에 가입했고, 201412 부터 평생 회원

되었다.

 

큰 오빠 50주기를 맞아 오빠 부부, 언니와 함께 평리 성당에서 기일 추모 미사 참례를

하고는 우리 집에 와서 연도를 바친 후 점심을 먹었다.

새벽에 운동도 빼 먹고 완벽한 채식 주의자인 오빠를 위하여 고기 안 들어간 잡채 거리도 미리 볶아 놓았고....

 

연도 바치면서.....

요새는 뭔 준비를 하던지, 누구를 만나면 이것이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왜 자꾸 들까?

전번에 계시던 본당 신부님께서 "사진 찍을 기회가 생기면 꼭 찍으세요.

어느 순간에 같이 못 찍을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라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나서

옆집 아줌마를 불러서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무더위가 한창인 때라서 산소(범물 천주교 묘원)에 갈 수 없는게 너무나 아쉬웠다.

엄마 기일(4/25)에 부모님 산소에 갔다가 큰 오빠 산소에 들렀더니,

우리들을 반기는 듯 영산홍이 만발해 있었다.

1985년(?) 큰오빠 기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