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20/07/20 남편 12주기의 회상(그 이후에 남편과 관련 된 일 첨부)

김혜란골롬바 2020. 7. 20. 08:46

평해 중학 시절

 

1966년 육군 재직 시절의 남편

 

1970년(?)쯤 남편의 7남매가 울진 옛 집에서 - 유난히도 우애가 깊은 남매들이었다.

1972년 여름에 약혼 사진삼아 억지로 사진관에 가자고 내가 우겨서 찍은 사진 

 

남편은 1972/08/15 성모승천 대축일(그 당시에는 성모 몽소 승천이라고 불렀음)에 범어 성당에서 황 마리오 신부님 주례로 사도 요한이라는 세례명으로 성세 성사를 받았다.

 

1972/10/07(토) 10월 유신이 발표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우리 둘은 결혼을 했다.

왼편 위쪽의 쪽지는 그 당시 영남일보에 실렸던 청첩

신부 대기실에서 성당으로~

신부 입장

시작 기도

혼인 서약

신랑, 신부를 위한 축복 기도

폐백실에서

가족과 친구들 기념사진

 
 

그 당시 범어 성당 주임 신부님이셨던 故 지 로꼬 신부님의 결혼 축하 카드

 
 

2023/09/10(주일)에 새삼스레 찾아낸 그 당시 오빠께서 근무하시던

왜관 성 분도 출판사 사장 신부님의 결혼 축하 카드

 
 

신혼여행지 유성 온천장에서

 

나는 1969년 5월부터 남구청에서,

남편은 1969년 하반기에 봉화군 소천면사무소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여,

봉화군 물야면사무소를 거쳐서, 울진면사무소도 아닌 울진군 울진면 죽변리(現 울진군 죽변읍) 출장소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우리 둘은 1970년 11월경상북도 인사위원회에서 주최하는 신규 임용반 교육(5주)에서 짝꿍으로 만났다.(두 사람이 결석하는 바람에 당겨서 앉다가....ㅎㅎ)

죽변리 출장소 앞에서

 

신혼 시절인데도 10월 유신 때문에 말단 공무원들은 너무 바빠서 집에도 못 갔었고,

결혼한 지 한 달이 되도록 남편은 대구에 나를 보러 오지 못 했다.

그래서 11월 첫 토요일, 퇴근 시간 맞추어서 울 엄마가 신혼여행 때 들고 갔던 여행 가방(그땐 캐리어는 택도 없었고...)을 남구청으로 갖고 오셨기에,

나는 오후 2시에 출발하는 울진 가는 막차를 겨우 탈 수 있었다.

울진에서 내려 죽변 가는 버스를 바꿔 타고 8시간 남짓 만에 죽변리 버스 정류소에 도착하니, 남편은 나를 기다리다 지쳐 동료 직원과 나눈 막걸리에 거나하게 취해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무척 화가 났었고, 허름한 식당에서 지금도 전혀  생각나지 않는 메뉴의

늦은 저녁 식사를 하고는 

칠흑같이 캄캄한 밤에 파도 소리만 철썩이는 죽변 방파제로 나를 데려갔다.

신혼여행 때 입었던 미니 원피스에 하이힐을 신고서 

비포장 도로를 8시간 이상 완행 버스에 시달려 온 피곤에 젖은 나에겐 

그 멋진 밤바다의 풍광도 다 꽝~!

바닷바람이 너무나 차가운데,  울퉁불퉁한 돌길 위를 비틀거리면서

화난 나를 달래주기 위하여 내 손을 꼭 잡고 그가 불러 준 노래!

 

"사랑해~ 사~랑해요~~~ 당신을 당~신 만을~~~

이 생명 다 바쳐서~ 이 목숨 다 바쳐서~

영원토록 당신 만을 사~랑~해~~~

가지 마오~ 가지 마오~~~

나를 두고 가지를~ 마~~ 오~~~"

 

"미스터 트로트"에서 찬원이가 이 노래를 불렀을 때,

그날 밤 죽변 방파제의 모습이 눈앞에 파노라마로 펼쳐졌다.

찬원이가 부른 "울지 마~~~, 울긴 왜~ 울어~~~", "18세 순이"

영웅이가 부른 "배신자" 등이 남편의 18번 곡들이었기에,

여러 채널에서 수없이 재방송되는 "미스터 트롯"에 내가 푹~ 빠졌는지도....ㅎㅎ 

 

같은 해 봄에 시숙님께서 결혼하셨기에,

한해에 두 번 신행하는 법은 없다고 해서, 울진 시댁에는 갈 엄두도 못 냈었고,

그날밤 호텔도 아닌(그 시절 울진엔 호텔도 없었지만)

지금의 여인숙보다도 못한 곳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다음 날 시댁에는 못 들어가도 어머님께 인사를 드려야 했고,

또 어머님께서 대구에 보내실 게 있으시다고 하셨다고,

나를 울진 정류소에서 기다리라고 하고선 남편은 본가로 달려갔다. 

잠시 후, 헐떡이면서 와서는 어머님께서 집에 안 계신다고 투덜거리더니,

내 옆에 쪼그리고 앉아 계신 분을 보고는 "어무이예~" 하는 게 아닌가?

서로 멀리 떨어져 살았고, 양가에 우리들이 사귀는 거 알리고는 두어 달 만에 결혼하느라, 결혼 전에 한번 뵙고, (그때는 얼굴도 못 들었으니...) 결혼식 때 뵈온 것이 다였으니,

고부간에 못 알아보는 불상사가~~~

옆에 있던 떡장사 曰 "이 새댁이 며느린 교? 이 새댁 아까부터 여기 서 있었는데...." ㅋㅋ

 

그러느라고 남편 오면 가방 맡기고 화장실 다녀온다는 걸 못 다녀왔고,

서둘러서 대구 가는 막차를 탔다.

참다가 참다가 어느 정류소에서 내리려니, 시간 바쁘다고 다음 정류소에서 갔다 오라고 해서, 정류소 옆집 화장실에 급히 달려갔는데, 나오려고 하니 커다란 개가 화장실 문 앞에서 으르렁 거리고 있었다. 

멀리서 버스는 빨리 오라고 빵빵거리지, 개는 날뛰면서 짖고 있지....

"에라! 모르겠다!" 하고 눈 질끈 감고 풀쩍 뛰어나와 버스로 뛰어갔다.

그 개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ㅎㅎ

그 결과 그다음 날부터 나는 방광염으로 고생했었고, 과로만 하면 재발했었다.

 

1973/11/08 큰 딸 백일 때

 

1974/08/01 큰 딸 첫 돌 기념 

(산격동 월셋방에서 일 년 동안 살다가 범어동에서 전세방 살 때)

 

1975/01/02 울진 옛 집에서의 가족사진

 

1976/04/14 작은 딸 백일 기념

 

1977/01/06 작은 딸 첫 돌 기념

 

1978/01/06 작은 딸 두 돌 기념

 

1986/02/18 큰 딸 경운 초등 졸업

 

1988년 작은 딸 경운 초등 졸업

 

1989년 2월 큰 딸 경화여중 졸업 기념

 

1989/07/28(금)~30(일) M.E 60차 교육 때 나눈 남편의 편지 일부.

세상 떠나고 나서 다시 읽어 봤더니, 그 당시엔 몰랐었는데

이것이 바로 남편이 남긴 유언장이었다!

 

질투(?) 날 정도로 유난히 정다웠던 두 모자

 

1991/12/08(주일) 윤일성당 세례식에서 동료 공무원의 첫 대부가 되었고....

그 후 이 분의 부인은 내가 대모로, 그 집 두 딸은 울 작은딸이 대모를 섰다. 

 

1992/12/20(주일) 본리 성당에서 나의 5촌 조카 부부 세례식에 우리 부부가 대부모를 섰고,

 

1998/02/24 영은 경북대학교 졸업

 

1999/09/18(토) 서울 길음동 성당에서 작은 딸이 혼인 성사를 받았고,

10/23(토)에는 서울 대명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2000/02/25 영은 고려대학교 석사 학위

 

2002/02/25 사위 고려대학교 의학박사학위

 

2002/10/03~6 남편 생일을 맞아 제주도에서 3박 4일을 보냈다.

 

2003/01/02 아버님 팔순 기념 가족사진(울진)

 

공무원 재직 時 신분증 사진

 

37여 년간의 공직 생활을 마무리하던 날

퇴임식 날 서구청 현관에서 서구청장(남편 왼쪽) 및 서구 의원들과

2006년 3월부터 2년 반 동안 청운신협 이사장 재직 당시의 모습

 

2008/04/26(토)에는 범물성당에서 둘째 시누님 아들 혼인 성사에 증인을 섰으며,

2008년 5월에는 청운신협 직원의 결혼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례를 섰다.

 

2008/07/23 발인날 아침 빈소

범물성당 신자 형님께서 빈소에 연도 하러 오시면서 써 오신 詩

 

2008년 8월 고교 동기회 카페 행사로 끄적거렸던 詩

 

2013/07/20(토) 5주기 청운신협에서 베풀어 준 추모 미사

남편 신협 재직 時 신협 근처에 있는 복자성당 주임이셨던

김정한 미카엘 신부님께서 집전하셨다.

추모 영상

 
 

2018년 조카들과 추석 성묘

10주기를 지내고 유교식 제사를 그만두면서 

10년 동안 해마다 빠짐없이 직원들과 함께 남편 추모 미사에 참례해 주셨던

청운신협 이사장(그 당시 전무)님께도 "이젠 제발 그 사람을 잊어 주십사"

고 당부드렸다. 

며칠 전 "이사장님 기일을 모른 척하고 넘겨버리기에는 너무나 찜찜해서

산소에 가서 절이라도 올려야 마음 편하겠으니 같이 가실 수 있느냐?" 하시길래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은 찌푸린 날씨인 어제 오후에

전에 남편과 같이 근무하던 여직원과 함께 산소에 다녀왔다.

코 끝이 아리도록 추웠고, 때 아닌 눈발이 흩뿌리던 2014년 봄,

現 이사장 취임식 날 아침에도 전무님과 나와 함께 남편 산소에 가서 

절을 올리고 술 한잔 올리더니....

 "이능우 이사장님은 제 인생의 멘토이십니다."라는 청운신협 김상수 이사장님의 말씀!

 

아직도 남편을 못 잊고 계시는 분 중의 또 한 분 - 제주도에 살고 계시는 군대 시절의

선배님이신데, 해마다 기일이면 잊지 않으시고 전화를 주시더니,

올해는 한 편의 詩를 보내 주셨다.

만남과 이별(고 이능우 친구 12주기에) 

                                   -한창조-

 

만남의 소중한 인연임을

범물동 아파트에서

밤새워 얘기하였습니다

 

제2의 인생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청운의 푸른 꿈을

돛배에 실었습니다

 

은하수 길 따라

희망봉을 향한 돛배가

순풍에 순항하였습니다

 

만선을 실은 돛배가

회리바람이 닥쳤습니다

노심초사 풍랑도 잘 헤쳐갔습니다

 

풍랑이 잦아들고

희망봉을 목전에 두고

그해 7월 20일 홀연히

서쪽 나라로 가셨습니다.

 

항진하던 돛배가

멈춘 지 12년!

이 풍진 세상

하염없이 흐릅니다.

 

만남은 곧 이별인 것을

이별은 곧 만남인 것을

 

부디부디 영면하소서!!

 

1984/07/30 제주도 여행 때의 두 가족(한라산 550m 고지에서)

 2018년 8월 제주도 여행 때는 회정식도 거하게 대접받았고.....  

 

청운신협 이사장실에 걸려 있는 역대 이사장님들 모습

산소 상석 밑에 놓아둔 방명록과 유품

 

12년째 우리 집에 놓여있는 유품들

 

2021/04/25(주일)

울 엄마 15주기를 맞아서 엄마 산소에 갔다가 지난 위령 성월(11월)에도 한식(4/4)에도 못 왔기에, 언니와 같이 남편 산소에 갔다.

산소 가까이 도달하자 아랫 줄에 플라스틱 통이 떨어져 있길래 혹시나 하고

뛰어 내려가 보니 남편 상석 밑에 둔 통이었다.

짐승의 짓? 열어보니 안에 들어있는 것들은 물에 젖어 엉망진창!

집에 갖고 와서는 다른 것들도 깨끗하게 닦고,

물에 젖어 붙은 방명록을 조심스레 떼어서 말렸다.

지난 추석 다음날(10/2)에 왔을 때 다시 색칠한 십자가의 색갈이 여전히 선명했다.

다 마르니 쭈굴쭈굴 한 것 들을 돌침대에 깔아 펴서는 

A4 용지에 날짜 순서대로 앞, 뒤로 붙이니 무려 8페이지나 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