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울 아버지 이야기

김혜란골롬바 2019. 8. 9. 04:32

 

울 아버지(蘇岩 金泳 <字>俌 <字> 아우구스티노)께서는 順川 金氏 절재("김종서"의 호)公 派의 후손으로

1900년 1월 28일(음력)에 부산에서 5남 3녀 중 3남으로 태어나셨다.

집안에서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1455년 "수양대군의 난"으로 김종서 장군과 그 다섯 아들들, 손자들이 죽임을 당할 때에, 절재공의 둘째 아들 "승벽"의 장남인 "중남"이 피신하여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지고, 개성에서 피신 생활을 하며 일가를 이루어, 이후 일명 순천 김 씨 "개성파"로 불리면서 19세기까지 세거해 오다가, 우리 할아버지께부산으로 옮겨 오신 후에 아버지를 출생하셨단다.

태어 나신지 얼마 후 아버지께서는 개성 숙부님 댁으로 양자로 보내져서 다시 조상들이 대대로 살던 개성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성장하셨단다.

1911년 6월에 꼬마 신랑으로 결혼을 하셨고,

1912년에는 개성 최초의 신식 교육기관인 "한영서원"의 초등과를 졸업하신 후, 이어 중등과와 고등과의 9년 과정을 수료하셨단다.

"한영서원" 재학 시절인 1916년 9월 "조선총독부"에서 시행한 "보통 문관 시험"최연소의 나이로 합격하셨다.

1918년 3월 한영 학원 교사 및 학생들(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아버지)

일본인 면접관이 나이 어린것을 귀엽게 보아

"너는 장차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라고 묻자,

"총리대신이 되고 싶습니다."

라고 대답해서 면접관을 놀라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온단다.

관리 채용 시험에 합격했는데 불구하고, 官界로 나가시지 않으신 이유는 알려지지 않고 있단다.

 

 

1920년 대 초 개성 학당 동창회 기념(맨 뒷줄 오른쪽에서 다섯번째가 아버지) 

1920년 9월 10월에 최초의 창작 희곡 작품인 "시인의 가정""정치삼매(情痴三昧)"완성하셨다.

1920년 9월 연극 "시인의가정"  공연을 마치고 캐스트, 스텝들과 함께 (뒷줄 오른쪽 두 번째가 아버지)

 

1920년대 개성(왼쪽이 당시 서울 수송 유치원 원감이셨던 아버지)

 

1922년 개성 상업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앞줄 한가운데가 승려인 교장 마쓰오, 그 왼쪽이 아버지)

1922년에 표지를 직접 디자인하셨다는 우리나라 최초의 희곡집인 "황야에서"는  장정가가 알려진 우리나라 최초의 단행본이라는 점에서 연극 문학사와 출판 미술사학적인 의의가 크단다.

왼쪽 상단부터 시계 방향으로 "황야에서" 표지, 속표지, 판권란, 비문(痹文 ; 책 머리글)

 

희곡집 "황야에서" 표지그림

 

 1926년부터 2년 가까이 "일본 도쿄 불교 조선 협회" 주간 및 "도쿄 조선 여자 동포원" 주간으로 계시면서 "일본 와세다 대학 정치학부"에서 수학하셨단다.

1926년 무렵 도쿄 조선 여자 동포원 가족들과 함께(맨 뒷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아버지)

 

1926년 8월"사의 찬미"의 주인공 "윤심덕"이 애인인 "김우진"과의 동반 자살과, 근무하시던 "도쿄 조선 여자 동포원"의 두 여자 동포원의 자살 사건에 충격을 입으셔서, 그 이후 절필(絶筆) 하셨던 게 아니신가 추측할 따름!

 

 1928년 3월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사""매일신보사" 편집국 근무를 시작으로 주욱 언론계에 종사하시다가, 1940년 10월 "매일신보사" 지방부장 임명에 이어, 1941년 7월에는 "매일신보사" 오사카 지부장에 임명되셔서 1년 남짓 온 가족이 일본에서 생활하셨단다.

 

1938년에 찍으신 사진

 

1945년 3월 "매일신보 경북 지사장"에 임명되셔서 대구로 이사하셨는데, 광복과 동시에 "매일신보"는 폐간되었고,

1945년 10월 "영남일보"를 동인제로 창간하여,

1945년 11월"영남일보" 초대 편집 국장을 임명받는데 이어,

1946년 2월"영남일보" 사장을 맡으심으로 10여 년간 언론계를 이끌어 오셨다.

달성공원에 시인 "이상화" 님의 시비를 세울 때 많은 힘을 기울이셨다고 들었다.

 

재직 시 "영남일보" 사옥 앞에서 찍으신 사진

(앞 줄 중앙에 두루막 입으신 분이 울 아버지)

 

 

친필로 쓰신 반야심경

1940년서울 덕수궁 왼쪽으로부터 아버지, ?, 정비석

 

그 외 공직 경력으로 대구 국제 로터리 클럽 부회장,  문총(文總) 경북 연합회 부회장, 적십자사 경북지사 상임위원, 경북 선거위원회 위원, 동방 신문 학원 원장, 경북대학교 사대부중, 고 사친회 회장, 경북 문화사업협회 최고의원,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후원회장 등을 맡으셨다. 

 

 

1965년 삼성 재벌의 이병철 회장이 "중앙일보"를 창간하려 할 때, 대구와 인연이 있었던 그가 이 신문을 맡아 줄 사람으로 울 아버지를 지목하고 찾았으나 이미 아버지께서는 1962년 9월 28일에  별세하신 후였다.

 

1950/12/05 육군 종군 작가단 발행 "전선 문학 제2집

 

1946년 9월에 울 언니가, 1949년 7월에는 내가 대구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1924년 7월부터 2년 동안 "경성 수송 유치원" 원감을 맡으신 덕분이신지 쉰둥이로 태어난 막내인 나와 잘 놀아 주셨던 기억이 난다.

내가 유치원 다닐 때 칭얼거리면 종종 업어 주셨고, 아버지 등에서 아버지께서 불러 주시는 "매기의 추억"을 들으면서 잠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사진기를 새로 사 오셨다고 남산동(굉장히 넓은 저택?) 집 이곳저곳에서 사진도 많이  찍어 주셨다.

 

남산동 집 대문 앞에서

 

사진기 시험하신다고 막 잠을 깬 나를 툇마루에 앉혀 놓으시고 찍으신 사진

1955년(내가 남산성당성모 유치원 다닐 때)의 사진

이날은 사진 찍는다고 울 엄마께서 예쁘게 치장해 주신 듯!ㅎㅎ

 

여자 아이 이름에는 거의 "子, 淑, 玉" 자가 들어가던 그 시절에 울 아버지께서는 "仁, 蘭" 자를

사용하시어 세련된 이름을 지어 주셨고, 커서 민소매 입으면 보기 흉하다고 나와 울 언니에게는 천연두 예방주사인 우두허벅지에 맞게 하셨다. 

또 우리 자매를 사립학교인 "효성국민학교"에 입학시키셨다.

 

1960/01/28(음력) 아버지 회갑 기념 

 

1960년 대의 아버지(1962/09/28 영정 사진으로 사용)

철딱서니 없던 나는 아버지 喪을 당했음에도 중간고사가 가까웠기에 결석하면 안 된다고 고집부려 학교에 가서는 화장실에 가서 엉엉~!

결국 담임 선생님(배정자 선생님)께 조퇴 허락받으러 가서 "어제 울 아버지 돌아가셨어요."

라고 말씀 드렸더니, 기가 막힌 듯 쳐다보시면서 

"오늘 같은 날 머 하러 학교 왔니?"

그 시절에는 빈소를 범어동 집에 마련했었고, 장례미사를 드리기 위하여 범어 성당까지 운구하여 가는데 광목 치마저고리 입은 내 모습을 학교 가던 동네 애들이 보는 게 부끄러워서 고개를 푹 숙이고 걸었던 기억이 난다. 

 

나 중1, 울 언니 고1, 경북대학교 수석 입학하셨던 울 오빠께서 대학교 2학년 2학기 때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작품 활동에 대하여 무슨 연유이신지 자식들에게 함구하셨다.

 

 

1979/10/01 영남일보 제11143호

 

1986년 3월 "김원중"님(문학박사 : 당시 대구한의과대학 재직)께서 편저하신

문고판 "김영보 희곡집" 표지

 

1986/06/25 字 대구 매일신문

 

인명사전 中에서

 

1992/12/01"대구 예술" 제22호 (총 6Page)

 

1993/11/15 재단법인 대한언론인회 編( 총 4Page)

 

 

 

1999년 8월 "권순종"님(문학박사 : 당시 구미 1 대학 재직)께서 편저하신

"황야에서" 단행본

 

 

"황야에서" 책  머리글로 2006년 9월 범물동 천주교 묘원 부모님 산소 앞에 세운

아버지 문학비의 앞면과 뒷면, 옆면

 

국문학을 전공하신 오빠께서 서울 종로 古 서적가를 몇 차례씩 뒤지시면서,

아버지 저서의 원본 - "꽃다운 선물"을 구하셨으며,

"꽃다운 선물" 뒤 표지와 속표지, 아래는 판권란

 

<1926년 늦은 봄(丙寅 晩春) 봄비를 들으며

 "수송유치원" 일실(一室)에서 金泳俌 씀>

(동요, 동화집 "꽃다운 선물" 발간 당시 머리말 끝에 쓰신 글)

 

아버지의 작품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해 오시다가  

2016년 3월, 오랜 작업 끝에 드디어 700쪽에 가까이 달하는 아버지 유고 문집인 "소암 김영보 전집"

울  오빠(김동소 야고보 <열뫼<開山> ; 문학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 명예교수)께서 발간하셨다.

 

희곡을 공부하는 이들이 구하기 힘든 원전을 찾아 헤매는 수고를 덜어 주기 위해서

원전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자 세로 쓰기를 가로 쓰기로 바꾼 것 외에는

표기법과 띄어쓰기, 부호 하나까지도 원전 그대로 실었단다.

 

 ("제1막" 첫 부분을 현대문으로 고쳐서 올림)

제목 "나의 세계로"

등장인물. 박승영 남작 63. 부인 59, 설자 장녀 28, 옥순 차녀 23,

              상호 설자의 아들 9. 이동순 소학교 교원 26. 민면식 자작 29. 하녀.

때, 현대 늦여름.

, 경성 교외.

1. 박 남작 저택 경내, 송림 사이. 무대는 하늘을 찌를 듯한 빽빽한 송림.

          그 아래로, 풀에 덮인 희미한 한 가닥의 좁은 길이 통하여 있다.

          그 좁은 길의 한 끝은, 무대 후편으로 멀리 송림 간에 은은히 보이는 민면식 자작의 별저와, 무대 저편으로 겨우 보이는 박승영 남작의 저택으로 통하여 있는 모양.

          때는 늦여름의 어느 날, 서로 엉킨 나뭇가지와 가지 사이로 여름 햇빛이 흘러 있다.

          길옆의 자연목 의자에는 소학교 교원 이동순과 옥순이가 같이 붙어 앉아 있다.

 

 옥순 (동순의 손 위에 자기 손을 얹으며) 왜 어제는 우리 집에 오셨다가, 그리 속히 돌아가셔요?

동순 (무엇을 생각하는 모양으로) 더 앉았을래도, 옥순 씨 언니 된다는 이가 유심히 내 얼굴만 주목을 하여 보는 것 같으니까, 갑자기 불쾌한 생각이 나서 그만 나왔지요.

옥순 언니가? 왜 그랬을까요?

동순 아마, 나 같은 자가, 옥순 씨 같은 귀족양양과 친절히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 상스러워 그런 것이겠지요.

옥순 (원망하는 듯이, 눈을 흘겨 동순을 보며) ?! 그런 말을 하셔요?

동순 무슨 말을?

옥순 귀족이니 영양이니, 하는 말씀말이야요.

동순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니까 어쩔 수 없지 않아요.

 

(이 글의 자료들은 "소암 김영보 전집"에서 발췌했습니다.)

 

 

2015년 11월에는 아버지의 희곡 작품 "연(戀)의 물결"이 처음으로 "한울림 소극장"에서

공연되었고,   

 

아버지께서 "대구 문화재단 2019 근현대 문화 예술인"으로 선정되신 것을 기념하여 2019년 8월 27일(화)부터 9월 1일(일)까지 희곡 "나의 세계로" "한울림 소극장"에서 연극으로 공연되었다. 

(신문 기사 내용)

 

  

 희곡 "나의 세계로"(全2幕) 

한울림 소극장 로비에 부착된 사진들

연극 "나의 세계로" 첫 장면

Curtain Call

 

연극 공연 후 출연 배우들과  가족들의 기념 촬영

내가 2022/08/30(화) 具 常 문학관을 방문했을 때  발췌

현재 오빠께서 소장하시고 계신 具 常 詩集(1951/05/10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