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성당, 성지순례 및 피정

2017/05/09 대구 로사리오회 내포(충청도)지방 성지순례(2) - 신리성지

김혜란골롬바 2017. 5. 21. 18:41

천안에 사는 친구 아들의 초대로 입에서 살살 녹는 우삼겹살을 배 부르게 대접 받고서

신리성지 로 갔다.

그곳에 도착하자 다시 비는 내리고....

"조선의 카타콤바", "순교자들의 고향", "순교자들의 안식처"로 불리워지는

신리성지는 조선천주교회의 요람으로서 1964년 부터 강당의 형태로 개축되어

공소로 사용되어 왔었는데, 2004년부터 성지 개발이 본격화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네.

신리는 박해기 조선에서 가장 큰 교우 마을이었는데,

병인박해 이전 까지 약 4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으며, 그들 모두가 천주교 신자들이었단다.

신리는 조선 천주교의 거점 역활을 하고 있었으며,

선교사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교우촌으로 인식 되었다네.

 

 

 

"승리의 성모상"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像 -

-그의 손에는 자연을 사랑하는 성인의 마음을 나타내듯 비둘기가 놓여 있었고....

친구가 찍은 사진엔 비둘기상에 진짜 새 한마리가 자리했네!

 

순교 박물관에 전시된 그림들

순교자들을 시신을 수습하는 모습

 

옛날 사제 서품 모습

 

 

 

 

아픔 없이는 남들을 기억할 수 없는

이곳 신리성지에 오면

들판에 부는 바람조차

님들의 목 쉰 소리로 우리를 부릅니다.

복음을 증거하다 목숨 바친 

순교 성인들과 동료 순교자들

이름 없이 잊혀지며 죽어 간 순교자들께

우리는 부끄러워 얼굴을 붉힙니다.

그 한결같은 신앙의 삶 닮지 못한 부끄러움

이토록 아름답고 유서 깊은 성지를

더 소중하게 가꾸고 지키지 못한 부끄러움

뉘우침의 기도로 봉헌하며 우리 마음 안에 먼저

기도의 기념비 하나 세우며 촛불을 밝힙니다.

 

눈물 없이는 님들을 기억할 수 없는

이곳 신리성지에 오면

매번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초조함 속에 

목자들과 교우들이 미사 중에 주고 받던

그 애절한 신뢰의 눈빛이 보이고

훗날 한국 교회의 보물이 될 사료 정리를 위해

밤낮으로 노심초사 땀 흘리던 

다블뤼 안 주교님의 글씨 쓰는 손길도 보입니다.

언제 잡혀 갈지 몰라

살아서도 이미 죽음을 체험하는 이들의

안타까운 한숨 소리도 들려 오고

박해의 칼 아래 무참히 스러졌기에

죽어서도 목 없는 시신으로 발견된

무명 순교자들의 마지막 신음 소리도 들려 옵니다.

 

지은 죄도 없이 어둠 속에 숨어 살았던

님들의 고통과 눈물이 있었기에

우리는 이렇게 밝음 속에 웃고 지냅니다.

피 흘려 신앙을 증거한 님들의 죽음이 있었기에

우리는 이렇게 자유 속에 편히 살고 있습니다.

그 은혜 충분히 감사하지 못하고 건성으로 살아온 날들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해인 수녀의 "신리성지에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