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블러그의 "큰 오빠 50주기에...." 란 글을 본 매일신문 추모관 "그립습니다" 코너
담당 기자가 그 글을 게재했으면 좋겠다는 연락이 와서,
1,700 여자로 수정하여 보냈더니, 드디어 2020/12/28(월) 字 조간 신문에 실렸다.
(기사 전문)
1946년 4월 우리 집에서는 세 아이(8세, 5세, 4세)가 한꺼번에 홍역을 하더란다.
”당시 5살짜리 큰 딸(나에게는 큰 언니)은 그때 세상을 떠나 산에 묻고 오니,
작은 아들도 또 보낼 것 같더니 억지로 살더라네!“ 라고 어머니는 나에게 전하셨다.
8살 짜리인 큰 오빠는 홍역 끝에 백일해를 얻어서 32년 동안 수 차례의 고비를 넘기시다가 결국 50년 전(1970년 7월 마지막 날)에 세상을 떠나셨다.
큰 오빠(金東秀 1939.2.19生)는 병약한거 빼고는 183cm의 훤칠한 키, 멋진 미남이셨다.
잦은 학교 결석에도 공부를 너무나 잘 하셨기에 경북중학교와 경북대 사대부고를 졸업하신 후, 원하던 경북대 물리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하셨으나, 건강 때문에 결국 대학 1학년을 다니시다가 중퇴하셨다.
입, 퇴원을 수 없이 하다가 큰 오빠 때문에 1960년 5월에 그 당시 공기 좋다는 범어동에 집을 지어서 이사까지 했다.
세상 떠나실 때까지 범어성당에서 교리 교사, 청년회, 성가대, 성당 안의 전기 기사로 봉사하셨고,
또 손재주가 좋으셔서 무엇이든지 척척 고쳐 내셨다.
아프신 중에도 기술학원을 다니시며 전파관리사 자격증을 따셨으며,
교동시장에서 재료를 사 와서는 그 당시 귀한 트란지스터 라듸오를 뚝닥 만드셨다.
노래도 너무나 잘 부르셨으며, 특히 가톨릭 성가 151번(“주여 임하소서”)을
울언니와 듀엣으로 종종 부르셨다.
1969년 6월26일~29일에는 왜관 성베네딕도 수도원 피정의 집에서 대구대교구 제1차 꾸르실료를 수료 하셨다.
1970년 7월 마지막 날 적십자 병원에서 장티푸스 진단을 받고는 법정 전염병이라고 대구 시립병원(現대구 의료원)으로 옮기는 택시 안에서 "어머니, 집에 가요!" 라고 자꾸 조르더라네!
그때는 그 병원가면 다 죽어서 나온다는 속설이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할 수 없이 택시를 돌려 집으로 가시는 중에,
어머니 무릎을 베고 숨을 거두셨다.
어머니께서는 택시 운전사가 내리라 할까 봐 겁이 나셔서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으시면서 숨도 못 쉬시다가 집에 오셔서는 대성통곡 하셨단다.
나는 어머니 연락을 받고 그 당시 근무하던 남구청에서 조퇴하여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 중이었다.
그날 새벽에 어머니께서 고열로 밤새 신음 중이시던 큰 오빠 방에 들어가셨더니,
"오늘이 마지막 날이네요." 하셨다.
"그게 무슨 말이니?" 하시자 큰 오빠께서
"아니, 오늘이 7월 마지막 날이라고요."라고 말을 돌리셨단다.
지나고보니 당신의 마지막 날을 미리 아셨던 듯하다.
지난 여름, 큰 오빠 50주기를 맞아 오빠 부부, 언니와 함께 평리성당에서 기일 연미사 참례를 하고는 함께 위령기도를 바쳤다.
무더위가 한창인 때라서 산소(범물 천주교 묘원)에 갈 수 없는게 너무나 아쉬웠다.
5살에 떠나보낸 큰 딸, 62세로 세상 떠나신 우리 아버지, 32살에 떠나보낸 큰 아들,
모두의 명을 이어시는 듯 어머니는 96세까지 한 많은 인생을 건강하고 깨끗하게 사시다가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 기일인 4월25일에 부모님 산소에 갔다가 큰 오빠 산소에 들렀더니,
우리들을 반기는 듯 영산홍이 만발해 있어 마음이 포근해졌다.
보고싶은 큰 오빠(김동수)의 여동생(김혜란)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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