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울 오빠 이야기(2)

란필레 2026. 3. 23. 12:08

2026/03/22(주일)에 받은 소식
한국어사와 알타이어학 연구 50년, 김동소 명예교수 인생 회고

인터뷰 일시 :
장소 : 경북대학교 도서관 개인문고 구역
대담 : 김양진(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진행 및 정리 : 오새내(<말과 글> 편집장), 계명대학교 Tabula Rasa College 교수)

 

김동소(야고보, 열뫼) 교수 인터뷰
경북대학교 도서관의 폐쇄구역, 고요한 공기가 감도는 개인문고 구역은 이번 인터뷰가 이루어진 장소이자 노학자의 일상이 머무는 곳입니다.
김동소 대구가톨릭대학교 명예교수는 지난 65세 정년퇴임과 함께 평생 모아 온 연구 자료와 장서들을 모교인 경북대학교 도서관에 기증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퇴임을 하고 책을 모교에 기증하는 것으로 학문적 소임을 다했다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기증한 책들로 빼곡한 그 폐쇄구역으로 출근하며 한국어의 기원을 찾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김동소 대구가톨릭대학교 명예교수는 한국 알타이학회국어사학회 회장을 역임하며,

우리 어문학의 지평을 유라시아 대륙으로 넓힌 분입니다.
그의 연구 인생은 대구의 한 고서점에서 우연히 집어 든 작은 성경 책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호기심으로 시작된 성경 수집은 50여 년의 세월을 관통하며 전 세계 800여 개 언어로 된 방대한 컬렉션이 되었고, 이는 다시 한국어의 원류를 추적하는 비교언어학적 통찰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평생을 바친 이 거대한 서사 앞에서 교수님은 뜻밖의 말씀을 건넵니다.
평생에 걸친 자신의 학문적 성취를 "삶의 무료함을 달래주는 유희" 혹은 "그저 살다 보니 도달한 곳"이라며 한없이 낮추어 말합니다.

거창한 철학이나 신념을 내세우기보다, 눈앞에 놓인 언어자료 하나에 온 마음을 쏟는 '담백한 성실함'이 빛나는 분이었습니다.
<말과 글>에서는 한국어의 내밀한 역사를 찾아가는 일에 평생을 바친 김동소 교수의 연구 인생과 그 속에 담긴 학문적 몰입의 세계를 전합니다.

 

김양진 : 1943년에 태어나셨으니 올해 83세이십니다.
어린 시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이 있으시다면 무엇인가요?

선생님의 아버님이신 김영보 선생께서 극작가이자 언론인으로 바쁘게 활동하셨고, 선생님께서도 최근에 《소암 김영보 전집》 발간 등

부친의 문학유산을 재조명하는 작업에 힘쓰셨습니다.
어린 시절과 관련해서 아버님 이야기도 좀 들려주십시오.
김동소 : 어린 시절의 저는 개구쟁이는 아니었고 얌전한 어린이였습니다.
주로 집에서 지내고 그랬던 것 같아요.
아버지의 활동은 아버지 돌아가시고 난 뒤에야, 한참 뒤에야 젊은 시절에 여러 가지로 활동하셨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쓰신 최초의 창작 희곡집도 집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제가 헌책방에서 발견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대학교 2학년 때인 1962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젊었을 때 연극을 하셨다는 것은 돌아가신 후에 알았습니다.
아마 그걸 일찍 알았더라면 저도 연극 쪽이나 극작 쪽에 관심을 보였을 텐데, 저는 전혀 몰랐습니다.
다만 6.25가 났을 때, 그때가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죠.

아무것도 모를 때인데 근데 나중에 그때 집에 출입했던 분들이 유명한 분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마해송 선생, 시인 구상 선생이 오셨어요.
아버지 하고 이야기하시던 거를 내가 옆에 앉아 본 적도 있고요.
아버지가 쓰신 책 《황야에서》(1922년)가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희곡집입니다.

그리고 아버님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우리나라 최초로 번역해서 출판하셨습니다.
김양진 : 선생님께서는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셨고 대학에서는 국어학을 전공하셨는데 이러한 전공을 선택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김동소 : 중고등학교 때인데, 그때 <말본>이라는 과목이 있었어요.
그게 아주 재미있었어요.
왜 재미있게 느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물론 그때 선생님이 마음에 들어서 그럴 수도 있고...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은 김수만 선생님이셨어요.
제가 국어 과목을 좋아했습니다.
대학에 입학해서 천시권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대학 들어가자마자 그분이 날 부르셔서 “앞으로 국어(학) 공부해라.” 그러셨어요.
제 자랑을 하나 하자면 그때 제가 경북대학교 수석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제가 지망한 곳이 사범대 국어과였는데, 사범대 국어과 합격자가 경북대학교 수석으로 입학하는 일은 전무후무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천시권 선생님이 이제 기대를 갖고 저를 국어학 제자로 삼으려 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게 선생님께서 저한테 관심을 많이 주시고, 1학년 입학하니 선생님께서 저에게 연구실에 나오라고 하시더니 영어로 된 책을 번역하는 일을 시키셨어요.
그 책을 번역은 다 하지는 못했습니다.
무슨 책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네요.
요즘은 지금 계속하고 있는 일이 아니면 자꾸 잊어버려요.
요즘도 있는지 몰라도 우리 때는 대학 졸업할 때 학사논문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그때 제 학사논문 주제가 ‘한국어 첩어 연구’인데 이게 해보니까 참 재미가 나더라고요.
김양진 : 대학 시절 어떤 교수님들께 배우셨습니까?

학문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받으신 스승님은 누구시며,
어떤 가르침을 주셨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김동소 : 저의 학문적 기반을 닦아주신 분은 지도교수님이신 천시권 선생님입니다.
천시권 선생님께서 제 학사, 석사, 박사 논문 지도교수셨습니다.
이분은 옛날 대구사범을 나오신 분인데 옛날에 대구사범은 천재들만 가는 데라고 했지요.
1961년에 제가 대학에 들어가서 박사학위를 받은 게 1981년이니까 천시권 선생님과의 인연이 20년 이상 계속되었지요.
그 외에도 골똘히 학문에 정진하시던 전재호 선생님께 큰 영향을 받았고, 사범대의 서병국 선생님, 인문대의 이기백 선생님 등도 당시 어학 분야에서 함께 계셨던 분들입니다.
김양진 : 선생님 박사학위 논문이 《한국어와 퉁구스어의 음운 비교 연구》입니다.

박사논문 쓰실 때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김동소 : 제 박사 논문은 한국어와 만주·퉁구스어의 비교 연구였습니다.
사실 석사 때부터 '첩어(첩용)' 현상에 관심이 많았어요.
여러 언어학 서적을 뒤져가며 다른 언어들의 사례를 수집하다 보니 자연스레 비교언어학적 관점을 갖게 되었습니다.

당시로서는 만주어와 한국어를 비교한 거의 최초의 학위 논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박사논문 쓸 때 학문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주신 분 중 한 분은 서울대학교의 김방한 교수님입니다.
직접 사사를 받은 제자는 아니었지만, 교수님께 배우기 위해 대구에서 서울 많이 갔습니다.
이기문 교수도 뵙고 그랬는데 김방한 교수님이 더 따뜻하게 저를 맞아주셨지요.
김방한 선생님과의 인연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선생님의 함춘(銜春) 김우진(극작가) 선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희 아버지가 일본에서 연극을 하실 때 김우진 선생과 아주 친하셨거든요.
하지만 김방한 선생님은 처음엔 아버지에 대한 언급을 꺼리시다가 나중에 마음을 여시고 옛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천시권 선생님이 대학에서 보직하시느라 바쁘셨어도 굉장히 안목이 넓으셨어요.
그런 넓은 안목이 제게 비교언어학적 길을 만들어주셨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천시권 선생님이 대구사범을 나오셨는데 그때 가르쳤던 일본인 선생 중에 책을 아주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분이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본으로 가면서 자기 책을 천시권 선생님께 물려주고 갔습니다.
대구에서 만주어에 관심이 있던 분은 박은용 교수님입니다.

이분은 만주어 사전을 만드실 정도로 열정이 대단하셨고,
저를 무척 아껴주셨습니다.
이분과의 인연으로 제가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박은용 선생님께서 어떤 계기로 그토록 만주어 연구에 몰두하셨는지는 20년 넘게 곁에 있으면서도 끝내 여쭤보지 못해 지금도 의문으로 남아있습니다.
당시 대구에는 만주어나 알타이어에 관심 있는 학자가 많지는 않았지만, 박은용 선생님을 중심으로 저와 조기태 교수, 그리고 부산에서 오시던 김영희, 김영일 교수 등이 인연을 맺고 있었습니다.
특히 김영희 교수는 알타이학회 발표 때 이기문 선생님께 호된 혹평을 듣고 자극을 받아, 터키로 건너가 2년 동안 치열하게 공부하고 돌아오기도 했죠
김양진 : 선생님께서 《한국어 변천사》를 쓰셨습니다.

우리가 아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언어란 어떤 거고 그 말들이 어떻게 변했을까요?
김동소 : 저는 기본적으로 신라, 백제, 고구려가 서로 다른 언어가 아니라 본래 하나의 언어였
다고 봅니다.
수백 년간 나라가 나뉘어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분화된 것이지, 서로 남남이었던 언어들이 모여 지금의 한국어가 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당시 삼국 사람들이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했을 것이라 봅니다.
김양진 : 고구려의 경우 다민족 국가였을 가능성이 있어 공통어가 무엇이었을지 고민이 됩니다만, 저도 기본적인 소통은 가능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김동소 :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삼국의 언어는 아무래도 '궁궐 내의 언어'를 의미하겠지요.

지명연구 등에서 나타나는 어휘 차이(예: 고구려의 '홀') 때문에 서로 다른 언어라고 보기도 하지만, 저는 기본적인 언어 사용 체계는 같았다고 봅니다.
김양진 : 선생님께서는 국어사 자료들을 아주 꼼꼼하게 형태소 분석하고 어휘를 정리해 오셨습니다.
이런 방대한 어휘 정리 작업이 국어학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김동소 : 과거의 언어에 접근할 때 우리가 가장 1차적으로, 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바로 '어휘'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요소들도 알면 좋겠지만 사실 파악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어휘 쪽에 관심을 두고 정리를 해왔는데, 아직 갈 길이 멉니다.
하다 만 기분이라 허무하기도 하네요.
김양진 : 선생님의 저서 《한국어 특질론》을 보면 우리말만의 독특한 성격에 대해 언급하셨는데요.
다른 언어와 비교했을 때 한국어만이 가진 가장 큰 고유성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김동소 :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참 어렵네요.
다만, 우리말에서 형용사와 동사의 차이는 형태적인 것이 아니라 의미적인 것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알타이어의 관점에서 보면 한국어의 형용사는 곧 동사라고 할 수 있죠.
형용사가 동사처럼 활용되는 이런 특징이 한국어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상의 특징에 대해서는 여전히 조심스럽습니다.
김양진 : 특별히 만주어나 여진어를 한국어와 비교 연구하시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김동소 : 이유는 단순합니다.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고, 언어적으로도 많이 닮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 조상들이 과거에 이미 이 언어들을 깊이 있게 연구해 놓은 자료들이 많다는 점도 큰 이유가 되었지요.
김양진 : 그렇다면 한국어와 이들 언어 사이에 유전적인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시는지요?
김동소 : 형태적으로는 아주 가깝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본래 같은 뿌리에서 온 '기원'의 문제
인지, 아니면 아주 오랜 시간 접촉하며 서로 빌려 쓰고 영향을 주고받은 '접촉'의 결과인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김양진 : 선생님께서 1990년에 내신 《여진어, 만어연구(女眞語, 滿語硏究)》

는 자료가 척박한 분야에서 나온 귀한 연구서입니다.
저도 대학 시절 스터디를 하며 큰 도움을 받았는데,
당시 연구하시며 어려운 점은 없으셨나요?

김동소 : 사실 그 책은 대단한 사명감을 가지고 썼다기보다, 그동안 써온 논문들을 모은 논문집 성격이 강합니다.
마침 출판을 제안해 주어서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지, 제가 특별히 대단한 의도를 가졌던 것은 아닙니다.
학문의 길이라는 게 때로는 그렇게 우연한 인연으로 이어지기도 하더군요.
김양진 :대구가톨릭대(대가대)에서 40년간 후학을 양성하셨는데, 교수님만의 특별한 교육 철학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김동소 : 너무 거창한 질문이네요.
사실 특별한 철학이랄 건 없습니다.
그저 먹고살기 위해 교수로 지내왔고, 마침 제 관심사가 알타이어 쪽이라 그 길을 묵묵히 걸어왔을 뿐입니다.
철학이라고 하기엔 부끄러운 마음이 앞서네요.
김양진 : 1956년 대구에서 창립된 '어문학회'는 지역 기반 학술지로서는 최초라 할 만큼 큰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활동하시던 박은용, 전재호, 서재극 선생님등과의 기억이 궁금합니다.
김동소 :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말씀드리자면, 당시 활동하시던 선생님들 중 성함을 바꾸신 분들이 계십니다.
박은용 선생님은 본래 '박팔회'라는 이름을 쓰셨고, 전재호 선생님은 '전재관'이라는 이름을 쓰셨지요.
정확한 내막은 다 알 수 없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나 좌익 관련 사상 검증 문제 등으로 인해 이름을 바꾸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서재극 선생님은 대학 선배이시기도 한데, 보직을 많이 맡으셔서 학문적 역량에 비해 활동을 많이 못 하신 게 아쉽습니다.
환갑잔치를 하시자마자 병을 얻어 정년도 채우지 못하고 일찍 돌아가셨던 기억이 납니다.
김양진 : 당시 부산보다 인구가 적었던 대구가 어떻게 어문학 연구의 중심지가 되어 이토록 오래 학회와 학술지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김동소 : 그것은 대구 특유의 '풍토' 덕분일 겁니다.
당시 대구는 부산보다 인구는 적었을지 몰라도 국어국문학과의 수는 훨씬 많았습니다.
당시 부산에는 국어국문학과가 부산대와 동아대 정도뿐이었지만,
대구는 경북대(사대, 문리대), 영남대, 계명대, 대구대 등 국문과가 설치된 대학이 6개나 되었습니다.
연구자 층이 워낙 두터웠기 때문에 어문학회가 자생적으로 활발하게 운영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김양진 : 교수님에 대해 검색해 보니 1997년에 이미 300여 개 언어의 성경을 모으셨다는 기사가 있더군요.
지금은 800여 개 언어, 50년 넘게 수집을 이어오고 계신데, 이 특별한 컬렉션의 시작이 궁금합니다.
김동소 : 대학교 2학년 때였을 겁니다.
대구가 6.25 전쟁을 겪지 않은 도시라 예전에는 시청 앞에 고서점이 참 많았어요.
시간 날 때마다 구경하러 가곤 했는데,

거기서 우연히 《Gospel in Many Tongues(여러 나라 말로 된 복음서)》라는 조그마한 영어 책자를 발견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한 구절을 692개 언어로 모아놓은 성경 견본집이었죠.
지금까지 갖고 있는데, 그 속에 '만주어'가 들어있더라고요.
김양진 :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님에 관한 책부터

최근의 만주어 복음서 역주 작업까지 꾸준히 번역을 이어오고 계십니다.
언어학자로서, 혹은 신앙인으로서 이 번역 작업은 어떤 의미인가요?
김동소 : 거창한 신앙적 동기보다는 학문적인 호기심이 컸습니다.
천주교 신자이긴 하지만, 처음엔 그저 만주어로 신구약 성경이 다 번역되어 있다는 사실에 감격해 수집을 시작했지요.
만주어 공부도 할 겸, 성경 공부도 할 겸 시작한 일입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은퇴 후 심심하기도 하고. 제 개인적인 공부를 위해 한 자 한 자 옮겨온 것뿐입니다.

김양진 : 선생님이 쓰신 여러 권의 책이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교수님의 학문 여정을 돌아보실 때 가장 큰 성취감을 느끼시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아울러 교수님만의 학문적 자세에 대해서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동소 : 성취감이라니요, 별로 없습니다.
대학에 있으니 논문을 써야 해서 썼고, 필요에 의해 책을 냈을 뿐입니다.
자부심보다는 오히려 '능력도 없으면서 욕심만 부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연구자로서의 철학을 물으신다면 참 민망합니다.
저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하거나 거창한 철학을 세우고 살지 못했습니다.
그저 살다 보니 이 나이가 되었고, 눈앞에 있는 관심 있는 공부를 계속해 왔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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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오빠 이야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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