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사진으로 보는 가톨릭 신자로서의 나의 일생(1) ; 1949년 7월 ~ 2006년 4월

김혜란골롬바 2018. 8. 18. 12:35

1949년 7월 9일

나는 아버지 金 泳<字>俌<字>(아우구스티노)님과 어머니 韓 萬<字>千<字>(바올라)님 사이에서 태어 났다.

태어나자마자 울 엄마의 젖에 병이 생겨서 엄마 젖은 한 번도 물어보지도 못한 채,

6.25 사변 전이라 우유는 구할 수 없어서 쌀미음으로 살다 보니,

면역성이 떨어진 탓인지 병에 걸려  첫돌이 지난 후에도 병아리 다리로 누워서만 지냈으며, 보는 사람마다 혀를 끌끌 차며 살기 힘들다고 했단다,

우리 집보다 먼저 신앙생활을 하셨던 숙모님께서 오셔서 보시고는

죽기 전에 견진 성사를 받아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나를 안고(그 당시 남산동 유스티노 신학교 건너편에서 살았기에...)  교구청으로 데려가셔서

서정길(?) 대주교님께 견진 성사를 받게 했단다.

교구청 교적 원본에는 1950년 10월 12일(1950년 00022호)로 적혀 있었다.

그 성사를 받고 교구청 마당으로 나오자, 안겨 있던 애가 자꾸 내리려고 해서 내려놓으니,

꽃을 가리키면서 아장아장 첫걸음을 떼더란다. 

나는 견진성사를 받고는 성령의 은혜로 다시 태어난 듯!

영세 대모님은 엄마에게 말씀 들었는데 누구신지 기억이 안 나고,

견진 대모님은 나의 사촌 수녀 언니이신 故 김혜경(요안나 -마리 쟌 선종)

수녀님이셨다.

 

국민학교 시절에는 병약하여 봄 소풍, 가을 운동회는 빠지기 일쑤였지만, 

다행히 중 고등 때는 3년 개근을 받을 정도로 건강했다.

 

 1955년 늦가을에 남산 성당 내 "성모 유치원"에 다닐 때 첫 영성체를 했는데,

너무 어렸던 탓인지 예수님을 처음으로 내 마음에 모신다는 감격은 전혀 느끼지 못했고,

그 당시 3시간의 공복재 때문에 춥고 배 고팠던 기억만 나네!ㅎㅎ

첫째줄 오른쪽 천사 두 번째가 나!

 

울 오빠께서는 1948/06/13에 나와 같은 유치원(그 당시 샛별유치원)에서 첫 영성체를 받으셨는데,

울 언니도 1953/03/06에 그 유치원에서 첫 영성체를 받았다.

(그 당시는 지금의 남산 성당성요셉 성당으로 불리었던 듯!)

 

그때의 일을 글로 적어서 보냈더니 내 글은 가톨릭 금빛 신문 48호誌(22/07/17字)에,

울 언니의 글은 52호誌(22/11/27字)에 실렸다.

그 당시 성모당은 나의 놀이터였다.

그때는 성모당에 자갈이 깔려 있었고, 어린 나에게 성모당이 무지 넓어 보였다.

 

1956년 3월 22일 성모 유치원 제11회 졸업식

원장 신부님(이성만 이냐시오 1976/10/03 선종)께서는 지금 성모당 내 성직자 묘지에

누워 계시고,,,,, 

밑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나!

그리고 나는 가톨릭계 사립학교인"효성 국민학교"(박상태 루도비코 교장 신부님 2004/09/03 선종)에 입학했다.

 

1969년 2월 10일~12일

범어성당 출신이신 곽길우(베드로) 신부님께서 사제 서품을 받으신 후,

첫 부임지인 충주 수안보 성당에 청년회원들과 함께 방문했다.

 

 

1972년 10월 7일(토)

나의 혼인성사받던 날 - 범어 성당에서

당시 영남일보에 실렸던 청첩과 나름 특이하게 상본 뒤에 인쇄한 청첩장.

주례는 청첩장과 달리 "지로꼬"신부님의 사양으로 "노 다니엘" 신부님께서 하셨고....

신부 대기실에서 성당으로....

 

둘째 숙부님과 함께 신부 입장!

 

 

 

혼인 서약식 - "나 김혜란 골롬바는 당신을 남편으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일생 신의를 지키며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약속합니다."

증인은 "김 휘(디모테오) 씨 부부" - 암으로 일찍 세상 떠나셨다네.

 

현재 친정 쪽 생존 인물 - 나와 울 오빠와 언니, 혜진 언니, 사촌 올케언니(귀주 엄마),

경자 언니, 소영 엄마, 앞줄에 소영이, 동기 오빠네 세 자녀(도열, 귀영, 희열) 

1972/10/10 신혼여행 다녀와서  범어동 옛 집 마당에서

 

1972/12/08

오빠의 혼인 성사가 범어 성당 옆 당시 성 콘벨뚜알 프란치스코 수도원 경당에서 있었다.

 

1980년 봄

범어성당에서 한 집에  같이 살던 지영은(레아), 민정(소피아)"유아 세례" 대모를 섰다.

 

나의 첫 대여는 1971년 범어성당에서 친구 유명수의 딸 정지안(율리안나)인지,

아니면 친척 경자 언니의 딸 김민아(헤레나) 인지?ㅎㅎ

지금까지 나의 대녀들은 모두 14명?

 

1982년 6월 첫째 주일

큰 딸이 두류 천주교회에서 첫 영성체를 받았다.

(강택규 예로니모 신부님 집전)

 

1984년 3월 14일(주일)

 "대구 직할 시청 가톨릭 신우회" 주관 일일 피정 

부부 동반 "미리내" 성지순례를 갔다.

당시 "미리내" 성지 개발 중이던 시절.

 

1984년 6월 8일(주일)

작은 딸이 두류 천주교회에서 첫 영성체를 받았다.

(故 김규태 디모테오 신부님 집전)

 

1985년 5월 14일(주일)

"대구 직할 시청 가톨릭 신우회"의 두 번째 일일 피정으로

"솔뫼, 해미 순교 성지"를 다녀왔다.

 

 

 

1986년 4월 27일(주일)

남편과 큰 딸이 평리 성당에서 이문희 대주교님 집전으로 "견진 성사"를 받았다.

(당시 장태식 리노 본당 신부님)

큰 딸(당시 중1)은 내가 결혼식 때 입었던 한복을 입었고, (앞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남편은 오른쪽 위에서 두 번째 줄에 서 있었네.

그때 남편과 같은 대부(박종기 니고나오 씨)로 언니네 아들(이항희 바오로)과

큰 딸(이지연 모니카)도 같이 "견진 성사"를 받았다.

큰 딸(대모는 이리자 씨)은 그 당시도 사진 찍는 걸 싫어해서.....ㅎㅎ

 

1989년 5월 14일(주일)

작은 딸이 본리 성당에서 이문희 대주교님 집전으로 "견진 성사"를 받았다.(대모는 이리자 씨)

(당시 권혁시 모이세 본당 신부님)

 

1989년 7월 28일(금)~30일(주일)

2박 3일 동안 "제60차 M.E 주말 피정"봉덕동에 있던 "여성 교육관"에서 수료했다.

피정을 마친 후 환영 온 두 딸들과 함께 기념 촬영!

 

1992년 12월 20일(주일)

본리 성당에서 남편과 함께 나의 5촌 조카 김종렬 부부의 영세 대부모를 섰다.

세례명은 기억이 안 나네.ㅉㅉ

 

1999년 9월 18일(토)

작은 딸이 서울 길음동 성당에서 "관면 혼인 성사"를 받았다.

 

2001년 여름(날짜 미상)

나의 첫 외손녀가 서울 길음동 성당에서  김지윤 파비올라세례성사를 받았다.

 

 

2004년 10월 4일~16일

12박 13일 동안 해외 첫 성지순례로 "이집트, 이스라엘, 이태리"를 다녀왔다.

이집트 시나이산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 엔게디 다윗의 동산

 

이스라엘 예수 승천 성당, 성모 영면 성당

 

 이스라엘 성 베드로 사도 수위권 성당

 

이태리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

 

이태리 오르비에토의 "성체 기적 성당" -

- 미사를 드리다가 성체를 의심하자 성작보가 피로 물 든 기적이 일어난 성당

 

2004년 11월 28일(주일)

매호 성당에서 정경희 글라라(하정 엄마)의 영세 대모를 섰다.

 

2005년 6월 4일

범물 성당에서 이판석(요셉) 신부님, 김추수(사비나) 자매님과 미사 복사 체험

 

 2005년 6월 10일

 남편이 퇴직 연수받고 있던 양양으로 가기 전에 "울진군 북면 성당" 방문!

전국에서 예쁘기로 손꼽히는 성당이며, 성당 마당의 천사들도 너무 예뻤다. 

 

 2006년 4월 17일~27일 "터어키, 그리스 성지 순례"

원래 12박 13일이었으나 갑작스러운 엄마의 선종으로 혼자서 이틀 앞당겨 귀국.

 

"성 소피아 사원" 내 황후가 예배 보던 자리에서

 

"바오로 사도"가 전도 여행을 떠났던 터어키 "쉘 루기아" 항구

 

"바오로 사도"의 고향인 터어키 "다르소스"의 우물가에서

 

"에페소"에 있는 "요한 사도"의 무덤 앞에서

 

 

"에페소" 옛 교회 터

 

그리스 "고린토" 옛 교회 터에서 엄마의 사망 미사를 드렸다.

 

"고린토" 대성전